경대승 정권 연구
서기 1170년 ‘무인시대’가 개막된 이후 고려에는 불과 10년도 안되어서 무인집권자가 3명이나 바뀌고 민란과 반란이 빈발한 난세가 전개되고 있었다. 그러던 1179년 송유인이 장악하고 있던 고려의 천하를 깨부수고 혜성같이 새롭게 등장한 경대승은 불과 당시 26살이었다. 물론 이전의 이의방이나 정균 같은 경우도 젊은 집권자축에 속했지만 아무도 경대승처럼 20대의 나이는 아니었다. 그런 의미에서 경대승이라는 젊은 무장이 장악하고 불과 30세의 나이로 요절할 때까지의 시대는 매우 흥미롭게 우리에게 다가오는 것이다. 경대승정권은 무신정권 100년에서 가장 독특한 시대였다. 왜냐하면 우선 경대승 자신은 역대 무인집권자들 중 유일하게 고려사 반역열전에 실리지 않고 정상적으로 열전에 들어있다. 이는 그가 다른 집권자들과는 달리 적어도 명분상으로는 ‘復古‘를 표방하며( ?고려사절요? 권12 명종 광효대왕 13년 가을 7월조) 정권을 잡아 과거전통을 존중하는 모습을 보였기 때문이다. 이러한 측면에서 경대승정권은 분명 여타 무인정권과는 다른 출발을 하고 있다. 현재 대하드라마 ’무인시대‘에서도 바로 위와 같은 요소들때문에 경대승이라는 인물을 매우 비중있게 다루고 있다. 여기에 부응하여 필자도 기존의 연구성과를 참조하고 나름대로의 상상력과 논리력을 동원하여 경대승정권에 대해 상세히 논해 보고자 한다. 우선 경대승이라는 인물을 알아보기 위해 그의 가문적 배경이었던 청주 지역에 대해 이해할 필요가 있을 것이다. 왜냐하면 당시 무인정변을 전후한 시대의 고려는 소위 ‘귀족문벌사회’라 해서 고려의 상류층들이 자신의 출신지역적 기반을 바탕으로 황도 개경에서 권력을 행사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경대승의 배경을 기본적으로 알려주는 기록은 다음과 같다.
경대승은 청주 사람이니 그의 부친 진(珍)은 중서시랑평장사(中書侍郞平章事) 벼슬을 지냈다. 경대승은 힘이 절등하게 세었다. 일찍이 큰 뜻을 품고 살림살이는 돌보지 않았다. 나이 15세에 문음(門蔭)으로 교위(校尉)에 보용되었고 여러 번 승직되어 장군으로 임명되었다. 그의 부친 경진은 본래 탐욕스러워서 타인의 토지를 많이 강탈하였으나 그가 죽은 후 경대승은 강탈한 토지 문건을 선군(選軍)에 바치고 한 뙈기의 땅도 남기지 않으니 사람들이 그의 청렴함에 탄복하였다. (고려사 권100 열전 제13 경대승) 현재 충청북도의 도청 소재지인 청주 지역은 교통의 요충지라는 지리적인 위치 때문에 일찍부터 각 세력들 간의 각축장이 되어 왔었다. 일찍이 ‘삼한’이 있었을 때부터 시작해 특히 삼국시대에 들어와서 백제와 신라의 충돌 지역의 중심이 되어 이 지역 사람들은 오랫동안 전란에 시달려 왔었다. 그러했기 때문에 오랜 기간동안 청주인들은 생존의 법칙을 배워야했고 또 처세에 능해야만 했다. 백제와 신라의 사이에서 정체성의 혼란을 느꼈던 청주인들은 이윽고 신라가 한반도 일대를 통합하자 신라의 ‘소경’의 하나로 행정적인 요충지로 각광을 받게 되었으나 정작 이들의 진가가 나타나기 시작한 때는 나말여초, 즉 우리가 말하는 ‘후삼국시대’에 들어와 서였다. 이때는 신라가 사분오열이 되어 각지의 호족들이 웅거하며 자웅을 겨루는 시대였는데, 특히 분열의 시대에 강한 생존력을 발휘하던 청주인들은 이때 궁예(나중에는 왕건)와 견훤의 쟁패전을 겪으면서 줄타기 외교를 벌여 독자적인 입지를 굳혀나가고 있었다. 그러다가 이윽고 왕건의 우세로 천하의 운명이 기울자 고려에 귀부하는 듯 했으나 기회주의적인 행태로 걸핏하면 왕건의 뒤통수를 치는 바람에 이윽고 왕건은 이들 청주인들을 사갈시하고 이후 이러한 전통이 남아 고려시대에 청주인들은 그리 두각을 나타내지 못하게 된 것이었다. 흔히 왕건이 유언으로 남긴 훈요십조에서 논란이 되는 ‘차령 이남’운운 하는 땅에 대해서 혹자는 전라도 일대를 가리키나 태조 왕건이 생존시 골치께나 썪었던 청주 일대를 지칭했을 가능성도 배제할 수는 없겠다 하겠다. 이러한 역사적 배경 때문에 청주인들은 고려가 안정기에 접어들면서 줄곧 불만세력으로 남게 되었고 중앙에서도 그만큼의 불이익을 당하며 배척받는 신세로 전락했다. 때문에 이들은 정상적인 방법으로 고려의 중앙관직에 진출할 수 없었으며 따라서 권력을 향유하지도 못했다. 그래서 야심 많은 이들이 선택한 길은 주로 비(非) 기득권층이 출세하는 유일한 방법인 ‘무인’이 되는 것이었다. 이들 중에 바로 경대승의 가문도 속했다.
고려의 무반(武班)은 대개가 문벌이 낮은 서인(庶人) 출신으로 군졸에서 기용된데 비해 경대승 가문은 무인정변 이전의 무관(武官)으로 비교적 가계(家系)가 좋았던 것으로 보인다. 그것은 아마도 청주 일대의 호족이었던 출신배경과도 무관하지 않았던 듯싶다. 경대승이 역사에 처음 나타나는 기록은 고려사 명종 4년인데 이때 그는 불과 21세의 나이로 동기인 송군수 등과 함께 황제의 친위대인 견룡군에 속해 있었다. 송군수는 나중에 경대승 자신이 아버지인 당대의 권력자 송유인과 함께 직접 제거하는 인물이었다. 그러나 위에서 보이듯이 경대승은 이미 15세에 관직에 올랐고 정중부를 제거하기 이전에 이미 장군의 반열에 오르고 있다. 무인정변 이후 금군(禁軍)의 정치적 역할은 크게 증대되었는데, 경대승의 빠른 출세는 그가 금군의 지휘관이었음과 무관하지 않다.
그런데 과연 경대승이 그 젊은 나이에 어떻게 이렇게 더구나 ‘청주인’이라는 핸디캪에도 불구하고 빠른 출세를 할 수 있었는가에 대해 다시 한번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이는 마치 신라의 김유신이 자신의 가야계라는 불리함을 극복하고 신라의 권력자가 된 경우를 연상하게 하나, 김유신의 경우는 상당히 오랜 기간 동안에 걸쳐 이루어낸 성과였다. 반면에 경대승은 15세에 첫 관직에 오른 이래 불과 10년 만에 장군이라는 고려 최고의 무인직에 오르게 된 것이었다. 우선 무인정변이라는 변수를 생각해 볼 수 있겠다. 1170년의 사건으로 기존의 고려질서가 붕괴되고 무인들이 권력을 장악하고 투쟁하는 양상으로 시대가 달라졌기 때문에, 기존의 아웃사이더였던 청주인들이 두각을 나타낼 여지가 충분히 있었다. 게다가 일찍이 무반에 진출했던 경대승 가문은 이의방이나 정중부 등과 친분이 있었기 때문에 청주의 경대승 가문은 무인정변의 혜택을 받는 위치에 오르게 된 것이었다. 그러므로 경대승의 빠른 출세의 이면에는 경대승 집권 이전에 사망한 것으로 추정되는 아버지 경진의 영향력이 크게 작용한 것으로 보인다. 그것이 아니라면 어린 나이에 무인정변 이후 최고의 권력을 상징하던 장군직에 그런 속도로 올라간 배경을 설명할 수 없기 때문이다.
다만 경대승이 가문의 후광만으로 승승장구했다고 볼 수는 없다. 위의 기록에서 보이듯이 경대승은 다른 무인들과는 또 다른 특출 난 점이 있었기 때문이다. 이로 미루어보아 경대승 자신의 무인으로서의 자질 또한 높은 평가를 받아 그의 출세에 도움이 된 것 같다. 아마도 경대승은 청주인의 전통적 기질을 이어받아 처세를 지혜롭게 헤쳐 나가는 방법을 일찍이 터득했을 것이다. 이의방이나 정중부 등이 모두 견룡 출신으로 무인시대가 열린 이후 이들 견룡 출신 장군들은 권력의 핵심을 독차지했는데, 경대승 자신도 이들이 밟은 ‘엘리트 과정’을 거쳐 ‘엘리트 무인’으로의 기반을 착착 다져나가고 있었다. 그리고 여기서 그는 장차 자신에게 도움이 될 광범위한 인맥을 형성하였을 것이다. 이는 마치 현대사에서 군부의 특정 육사 몇 기생들이 권력을 독점하는 양상과 매우 비슷하다 하겠다. 또한 위의 기록에서 경대승이 부친인 경진이 죽은 이후 땅을 모두 반납했다는 기사가 나오는데, 이것이 과연 경대승의 진심인지는 알 수 없으나 결과적으로 그의 평판을 높이는 데는 일조를 했음이 분명하다. 이렇듯 앞의 내용을 종합적으로 분석해본다면 경대승은 새파랗게 젊은 나이 때부터 미래를 바라볼 줄 아는 상당한 용의주도한 인물이었음을 우리는 알 수 있다.
그렇다면 이렇게 당시 무인정변의 수혜자 입장에 있던 경대승이 왜 정중부정권을 전복시키려고 했을까? 다음의 기록부터 보도록 하자.
명종 8년에 청주 사람들이 청주 사람으로서 서울에 적(籍)을 두고 살다가 청주로 퇴거하는 사람들과의 사이가 좋지 못하여 서울서 살던 사람들을 거의 다 잡아 죽였다. 그리하여 서울에 남아 있는 그들의 일당들이 이 소문을 듣고 복수하기 위하여 왕의 지시를 위조하고 결사대원을 모집하여 청주로 내려 보냈다. 왕이 장군 한경뢰(韓慶賴) 등을 뒤쫓아 보내 제지하려 하였으나 시간이 불급하여 그들이 청주 사람들과 싸워 이기지 못하고 백여 명이 죽었다. 그때에 경대승이 대장군 박순필(朴純弼)과 함께 청주의 사심관(事審官)으로 되었었는데 이것을 제지하지 못하였다하여 면직되었으며 부사 조온서(趙溫舒)도 파면되었다. (上同)
이 기사는 정중부정권 말기 송유인의 집권 시 권력의 균형이 무너지던 상황을 보여주는데, 그러면서도 청주인들 간의 내분이 일어난 사실은 매우 특이하다 하겠다. 사실 청주인들 끼리의 분란은 이전부터 종종 있어왔으나 이 ‘청주변란’사건은 무인정변 이후 청주인들의 동향을 적나라하게 보여준다는 측면에서 보다 자세히 살펴볼 필요가 있다. 드라마에서는 청주인들이 정중부정권의 횡포에 맞서 싸우는 ‘민중항쟁’으로 그려졌으나 과연 실제로도 그랬을까? 필자가 보기에 이 사건의 전말은 다음과 같다. 즉, 청주인들은 오랫동안 중앙의 외면을 받는 신세였다가 무인정변 이후 그들에게 출세의 길이 열리자 많은 이들이 중앙에 진출하려고 서로 각축을 벌였던 것 같다. 그러다가 일부만이 선택되어 올라가자 남은 이들은 불만을 품게 되고, 이것이 한이 되어 이제 황도에 올라갔던 이들이 정세가 불안해 다시 낙향하려 하자 그들을 제지함으로써 분풀이를 하려했던 것 같다. 이것이 이윽고 유혈사태로 비화되고 중앙에서는 이를 수습하려고 군대를 파견하나 참패당하고 경대승이 그 책임을 지고 관직에서 물러나게 되는 것이었다.
결국 이 사건은 청주인들의 오랫동안의 숙원인 ‘중앙진출’을 둘러싼 구성원들간의 이해관계에서 촉발된 지극히 사적인 원한싸움이었다. 그러나 이 사건을 다시 살펴보면 조정에서 경대승에게 이 사건을 제압하지 못했다 해서 파면했다고 했는데, 경대승의 입장에서는 당연히 청주가 자신의 배경이 되는 이상 그 분열과 피폐화를 막기 위해 청주인들간의 화합을 도모했을 것이다. 그러나 경대승 자신 역시 황도로 올라가 출세한 부류에 속했으니 황도진출에 실패한 이들의 눈에 곱게 보일 리가 없었을 것이다. 결과적으로 경대승의 노력은 실패했는데, 이 미묘한 시점에 당시 집권자인 송유인이 경대승을 내려보낸 것은 다분히 경대승을 견제하기 위한 측면이 있었던 것 같다. 아마도 송유인은 경대승의 노력이 실패할 것을 예견하고 이를 핑계로 장차 위협이 될 경대승을 숙청하려고 했던 것 같다. 여기에서 우리는 송유인의 정치적인 수완을 다시 한번 엿볼 수 있고, 이를 간파했을 경대승의 분노를 충분히 상상해볼 수 있을 것이다. 이때부터 경대승은 정중부정권에 대해 도전적인 태도를 취하게 된다.
A. 경대승은 일찍이 정중부의 독판치는 행동을 분히 여겨 그를 죽이려 생각하였으나 그 일이 지극히 크고 간난하기 때문에 참고 발동하지 않았었다. 마침 그때 정중부의 아들 정균이 공주에게 장가들려는 욕망을 음모하고 있었으므로 왕의 걱정거리로 되었다. 이에 경대승이 정중부를 죽일 결심은 치열하게 가졌으나 정중부의 사위 송유인의 존재가 두려워서 틈을 얻지 못하였다. 그러자 송유인이 문극겸과 한문준을 내쫓고 난 후로 몹시 인심을 잃었으며 조정 관리들도 모두 그를 눈흘겨보게 되었다. 견룡 허승은 용력이 있었으므로 사람들이 복종하게 되었으며 정균도 그를 사랑하였다. 그런데 허승과 대정(大正) 김광립, 김준익 등은 모두 경대승과도 사이가 좋았다.
9년에 경대승이 허승에게 말하기를
“내가 흉적들을 처치하려는데 네가 내 말을 들으면 성사가 되겠다.”
라고 하니 허승이 승낙하였다. 경대승이 말하기를
“장경회(藏經會)가 끝나는 날 밤에 야간 숙위(宿衛)하는 사람들이 필시 피곤하여 잠들 것이니 내가 결사대원 30여 명을 화의문(和義門) 밖에 매복하여 두었다가 네가 먼저 안에서 정균을 죽이고 휘파람을 불어 신호하면 내가 매복조를 발동시켜 호응하겠다”
라고 하였다. 그리하여 밤 4경(四鼓)에 허승이 정균의 숙직하는 집으로 들어가 그를 죽이고 휘파람으로 신호하니 경대승이 경사대원을 인솔하고 왕궁담을 넘어 들어가서 대장군(大將軍) 이경백(李景伯)과 지유 문공려(文公呂)를 죽이고 사람을 보는 대로 죽이니 궁중이 소란하여지며 무기로써 서로 싸우게 되어 왕이 몹시 놀랐다. 경대승이 왕의 침전 밖에 이르려 큰 소리로 외치기를
“저이들이 국가를 보위하려는 것이니 놀라지 말기를 바라오”
라고 하니 왕이 왕궁 문으로 나와서 경대승 등을 불러서 친히 술을 주고 위로하였다. 경대승이 그 자리에서 왕에게 금군(禁軍)을 출동시켜 정중부와 송유인의 부자(父子)을 체포할 것을 요청하였다. 정중부 등이 사변이 발생된 소문을 듣고 도망쳐 민가(民家)에 숨어 있었는데 모조리 잡아 죽이고 그들의 머리를 베어 시가에 효수(梟首)하였다.
왕이 경대승을 불러
“정균의 관직 승선을 그대에게 주겠노라”
라고 물으니 경대승이 대답하기를
“저는 글을 몰라서 감히 바라지 않는 바입니다”
라고 하였다. 왕이 말하기를
“그대가 아니라면 누구 적합한 사람이 있는가? 이부시랑(吏部侍郞) 오광척(吳光陟)이 어떨까?”
라고 하므로 경대승이 대답하기를
“승선은 왕의 명령을 전달 보고하는 직무인즉 선비 출신이 아니고는 될 수 없습니다. 오광척이 약간 글을 알고 있으나 그래도 무관이니 정균이나 다름없을 듯 합니다”
라고 하니 왕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이는 경대승과 오광척이 틀림없이 승선으로 임명될 것을 짐작하고 그를 미워서 하는 말이었다. 경대승의 족형(族兄)인 장군 손석(孫碩)은 평소부터 오광척을 원수로 여기고 있었으므로 경대승을 꾀어 오광척까지 죽이고 4집의 일당인 장군 김광영(金光英), 지유 석화(石和), 습련(襲蓮), 중랑장 송득수(宋得秀), 기세정(奇世貞) 등을 잡아 죽이니 조정 관리들이 대궐로 들어가서 축하를 드렸다. (上同)
B. 장군 경대승은 평소부터 정중부의 소행에 대하여 분노하였으며 또 정균이 은밀히 공주를 처로 삼을 마음을 품고 있었으므로 임금도 걱정하고 있었다. 경대승이 그를 제거하기 위해 전심전력하다가 마침내 정균을 죽이고 나서는 금군(禁軍)을 나누어 파견하여 정중부, 송유인, 유인의 아들 장군 송군수를 체포케 했는데 정중부 등이 정변이 발생한 것을 알고 도망가서 은닉하고 있었으나 모두 체포한 후 죽여서 저자에 효수(梟首)하였더니 일국이 모두 크게 기뻐하였다. (고려사 권128 열전 제41 반역2 정중부)
C. 항상 무인들의 불법한 행동에 분개하여 개연(慨然)히 復古의 뜻이 있었으므로, 문관들이 기대어 존중히 여기었다. 또 의종을 시해한 자를 치고자 하였으나, 그 일이 어렵고 크기 때문에 표면에 나타내지 못하더니, 정중부?송유인 등을 죽이자 왕이 속마음으로는 꺼리나 겉으로는 두터운 은총을 보여서 모든 주청(奏請)을 굽혀가며 좇지 않는 것이 없었다. (고려사절요 권12 명종 광효대왕 13년 가을 7월조)
위의 기록들에서 공통적으로 경대승이 이미 오래 전부터 정중부정권을 타도하기 위한 마음을 가지고 있었다고 기술했으나 그 기록들이 등장한 시점으로 볼 때 그것을 그대로 받아들이기는 어렵다. 사실 경대승이 본격적으로 정중부정권에 불만을 갖고 타도를 위한 준비에 들어간 것은 자신이 관직에서 쫓겨나 첫 좌절을 맛본 때였을 가능성이 더 높다 하겠다. 25세의 혈기방장하고 야심만만한 청년장군에게 이러한 굴욕은 용납할 수 없는 것이었을 것이고 해주의 천민 출신인 정중부 가문과 비교해서 자신은 하등 모자랄 것이 없다는 ‘귀족의식’도 이때 재삼 경대승을 자극했을 법도 하다. 다시 말해, 경대승은 사적인 원한으로 인해 정중부정권을 타도할 명분을 구축했던 것이었다. 이렇게 본다면 A와 B에서 송유인에게 권력을 빼앗긴 정균이 그 울분을 참지 못해 변태 싸이코 짓을 남발하다가 이윽고 황제의 딸인 공주에게까지 손을 뻗히자 경대승이 이를 분하게 여겨 정균과 정중부를 죽일 결심을 가지게 되었다는 기록도 새롭게 해석될 여지가 있다. 왜냐하면 당시 정균과 정중부는 실권이 없었기 때문에 경대승이 이들에게 화를 낼 이유는 사적인 관계가 아니면 이 상황을 이해할 수가 없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경대승은 이때 공주와 연인관계에 있었을 여지도 있는데, 한 가지 재미있는 사실은 위의 기록에서는 그냥 ‘공주’라고만 해 드라마에서처럼 꼭 경대승이 수안궁주와 연인관계였을 보장은 없다는 것이다. 어쨌든 경대승이 사적인 원한으로 정변을 계획했다는 사실은 A에서 보이듯이 경대승이 제일 먼저 제거한 인물이 자신에게 동기부여를 한 정균이지 당시 집권자 송유인이 아니었다는 데서 또 한번 드러난다.
그런데 C에서의 ‘복고’라는 표현에 우리는 주목할 필요가 있다. 이는 ‘옛날로 되돌린다’라는 뜻인데, 이 때문에 경대승은 명분을 갖고 거병한 유일한 무인집권자로 알려져 있다. 그러나 경대승이 거병한 배경을 달리 본다면, 이 ‘복고’를 꼭 무인정변 이전이라고 단정할 근거는 어디에도 없다. 물론 여태까지의 분석에 의하면 경대승은 매우 야망이 컸고 그릇이 남달랐던 인물임에는 틀림없고, 또한 드라마에서처럼 백성들을 구제할 뜻도 가졌을 가능성도 있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그는 매우 권력지향적인 인물이었다. 그리고 자신이 품은 대망을 펼치기 위해서라도 일단 천하를 얻어야만 했다. 그러므로 드라마에서처럼 경대승이 어쩔 수 없는 운명으로 원치 않게 정변을 일으킨 묘사는 틀린 것이다. 이 ‘복고’의 정체에 대해서는 나중에 별도로 언급하기로 한다.
A에서도 어느 정도 시사하듯이 경대승이 정중부 제거를 결심한 데는 송유인으로 대표되는 무인세력이 문극겸과 한문준을 탄핵한 것이 결정적인 계기였다. 경대승은 송유인에 대한 朝野의 비난을 기화로 정중부를 제거하더라도 자신에게 불리한 상황은 전개되지 않을 것으로 예견하고, 나아가 조야의 인심이 자신에게 모일 것을 기대했을 여지도 있었을 것이다. 게다가 무인정변의 주역들이 서기 1179년에 이르러 대거 사망한 것도 경대승에게 同年의 정변의 토대를 제공하는 데에 일조한 것으로 보인다. 1179년에만 들어서서 기탁성(2월), 우학유(5월), 홍중방(5월), 진준(6월) 등 서기 1170년 무인정변의 주역들이 대거 세상을 떠난 것은 분명 당시 정중부정권에 있어서 적지 않은 손실이었을 것이다. 그것은 반대로 정중부정권을 제거하려던 경대승에게는 고무적인 소식이었을 것이다.
그런데 아무리 경대승이 정중부정권을 전복할 호조건들이 마련되었다 하더라도 실제로 이를 추진하고 지원할 배후세력이 없으면 정변은 성공할 수가 없을 것임은 자명한 이치였다. 그러나 경대승은 이미 정변에 필요한 그러한 인적 요소를 구비했던 것으로 보인다. 우선 당시 무인집권세력의 일부였던 이소응이 경대승과 인척관계에 있었다. 게다가 경대승의 집권과 더불어 직위를 높여간 이광정과 최충렬도 무관했다고만은 볼 수 없다. 특히 최충렬의 경우는 한때 정중부의 측근이었으나 1178년의 무고사건(고려사 정중부전 참조)으로 정중부에게 반감을 품었을 여지가 농후하다. 이렇게 보면, 경대승의 정변은 이들 같은 상당수에 달하는 무인들의 협조에 힘입어 성공했다고 볼 수 있다.
A에서 언급했듯이, 송유인이 문극겸을 탄핵한 것은 결국 고려사 문극겸전에 나와 있듯이 문극겸을 지지하던 많은 무인들의 정중부정권에서의 이탈을 초래한 것으로 보인다. 송유인의 월권행사에 불만을 품은 무인들은 결국 경대승을 지지하거나 적어도 경대승의 정변을 방관했을 가능성이 있는데 이는 경대승이 정변을 일으켰을 때 중방이 이를 응징한 기록을 발견할 수 없는 데서도 분명하게 드러나는 사실이다. 중방의 이러한 태도에는 분명 反정중부 무인들과 경대승과의 개인적 인맥을 구성하던 무인들의 역할이 변수로 작용했을 것이다. 실제로 위의 기록들에서 경대승의 정변은 단독으로 실행해 성공했다고 보기에 어려울 만큼 일사천리로 진행되고 있는 것이다.
A에서는 경대승이 정중부정권을 무너뜨린 이후 당시 황제인 명종과 대면하는 장면이 마치 대하드라마를 보듯이 생생히 묘사되어 있다. 그리고 경대승이 황제에게 대하는 태도는 매우 고압적이라 경대승의 성격이 그대로 드러나 있는 부분이라 하겠다. 과연 당대 권력가문인 정중부 일당을 소탕하고 아버지뻘인 자신에게 당돌하게 대하는 26세의 장군을 대하는 명종의 마음은 어땠을까? A에서 보면 경대승은 황제의 의견을 계속 묵살하며 자신의 뜻대로 일을 추진하며 심지어 명종의 허락 없이 마음대로 장군을 죽이는 행동도 서슴지 않고 있다. 그러므로 C의 표현을 빌리자면 ‘왕이 속마음으로는 꺼리나 겉으로는 두터운 은총을 보여서 모든 주청(奏請)을 굽혀가며 좇지 않는 것이 없었다’는 것도 무리는 아니었다. 바야흐로 무인정변의 주역도 아니면서 당돌하게 그 주역들을 숙청하며 어수선하게 등장한 ‘청년영웅’의 시대가 열린 것이었다.
경대승은 서기 1179년 소위 말하자면 ‘청년 엘리트 장교’들의 쿠데타를 일으켜 무인정변의 얼굴마담 역할을 했던 정중부 정권을 무너뜨리고 새로운 집권자가 된다. 이를 위해 경대승은 지지세력을 규합하는 주도면밀함을 보이고 나름대로의 비전도 가지고 있었다고 말할 증거들이 사료들에서 보임은 앞 편에서 다룬바와 같다. 더욱이 아이러니컬한 것은 그를 도왔던 무인들이 이소응의 예와 같이 서기 1170년 당시 정중부와 함께 무인정변을 거사했던 이들이었다는 것이다. 이는 당시 정중부정권의 분열상의 정도를 가늠해주는 척도인 동시에 당시 정중부정권의 실권자가 정중부가 아닌 사위 송유인이었다는 사실이 그들로 하여금 이러한 도덕적으로 고민할 만한 여지를 다소나마 해소해주었다고 볼 수 있다. 더욱이 무인정변 이후 조정과 군부의 요직에 포진해있던 이들과의 ‘커넥션’으로 인해 경대승이 거사에 성공하는 데 여러모로 ‘편의’를 봐주었을 여지도 또한 매우 컸다.
그러나 경대승이 정중부정권을 타도하기까지의 과정이 비록 용의주도했다해도 일단 자신이 정국의 전면에 나서서 주도권을 장악하는 과정은 또 다른 문제였다. 왜냐하면 경대승은 자신이 집권한 이후 어떠한 정치적 구상을 가지고 고려를 리드할지에 대한 준비가 거의 전무했다고 보이는 증거가 사료의 곳곳에서 보이기 때문이다. 경대승에 협조했던 이들이 이제 서서히 ‘기득권’과 ‘지분’을 요구하며 경대승을 압박하기 시작했다. 경대승에게 도전한 첫 번째 인물은 바로 같이 거사에 동참해 주도적인 역할을 담당했던 견룡군 출신의 허승이었다.
허승은 앞 편에서도 보았듯이 견룡군을 이끌던 장수로서 정균의 휘하에 있었으나 평소에 경대승과도 막역한 사이로 사료에 나온다. 그런데 경대승이 허승이 없으면 거사를 성공시킬 수 없다고 말하는 것으로 보아 그의 역할이 얼마나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었는지를 가늠할 수가 있다. 이로 미루어보건데 허승은 경대승이 1178년 ‘청주변란’으로 관직에서 쫓겨난 이후 경대승의 공백을 뒤이어 견룡군을 장악했을 것으로 보인다. 그가 정균의 총애를 받았다는 데서도 이를 쉽게 유추할 수가 있다. 아마도 허승은 정균이 당시 송유인을 견제하기 위해 따로 자기사람으로 만들어놓았을 여지가 있다. 말하자면 허승은 경대승의 ‘군인 후배’였을 것이므로 나이 또한 경대승보다도 더욱 어렸을 것이다. 그러나 허승은 일찍이 경대승과도 친했음에도 불구하고 경대승과 원수지간이 된 정중부정권의 ‘충견’이 되었다는 사실은 경대승과 허승의 관계가 단순히 ‘의리’로 맺어지지는 않았으리라는 추정도 가능하게 한다. 즉, 경대승이 정균의 휘하에 있던 허승을 개인적인 친분만으로 정균을 배신케하기에는 역부족이었고 별도로 고도의 정치술을 필요로 했을 것인데, 여기에는 역시 경대승에 협조했던 무인들의 역할이 있었을 것이다. 이를 종합해본다면 허승은 매우 이해타산에 민감한 인물이었고 정균을 쉽게 배신한 것에서도 보이듯이 신의를 나눌 수 없는 경박한 성격의 소유자였을 것이다. 그러므로 일단 거사가 성공한 이후 경대승과 허승의 반목은 불을 보듯 뻔한 것이었다. 다음의 기록을 보자.
허승과 김광립 등도 경대승과 같이 공 세운 것을 믿고 교만을 부리면서 은밀히 불량배들을 양성하였다. 또 왕태자에게 친근하게 시종하면서 태자궁(宮) 후면 벽에서 누워 자며 밤새도록 노래를 부르며 풍악을 치는 등 방약무인의 행동을 하므로 경대승이 그들을 꺼리게 되었다. 그리하여 허승을 자기 집으로 불러다가 죽이고 김광립을 도중에서 만나 선 자리에서 죽였으며 군대의 호위를 강화하는 한편 왕에게 고하기를
“허승 등이 방자하여 저를 죽이려 할 뿐만 아니라 반역까지 음모하고 있었는바 사정이 절박하여 미처 보고할 사이가 없어서 이미 죽였습니다”
라고 하니 왕이 근신을 시켜서 위로의 말을 전하였으며 재상 이하는 모두 그의 집으로 찾아가서 축하하고 혹은 편지를 보내 치하하니 경대승이 적이 스스로 안심하고 군대의 호위를 그만두었다. (고려사 경대승전)
위의 기록에서는 몇 가지 점이 눈에 띄는데, 우선 허승이 젊은 혈기 때문인지 아니면 원래 성격이 그런지는 몰라도 ‘불량배’들을 모으며 거사의 공로를 빗대어 태자를 떠받드면서 온갖 교만을 부리는 장면이 보인다. 그런데 허승이 유독 태자에게 접근해 권세를 누리려는 의도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사실 경대승이 거사하는데 있어서 일등공신을 꼽으라면 당연히 허승일 것이다. 그러므로 그가 ‘교만’을 부리는 것은 사못 이해가 되는 부분이다. 그런데 왜 그는 태자에게 접근했을까? 필자의 생각에는 이미 경대승이 명종을 ‘제압’하는 장면을 목격한 허승이 이에 대한 견제 차원에서 태자에게 접근해 경대승의 독주를 막으려던 의도가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이는 허승 단독의 구상으로 보기에는 어렵고, 아마도 일찍이 허승과 경대승을 연결시켜 주었을 것이라 짐작되는 일단의 ‘무인’들이 배후에서 이를 충동질했을 가능성도 있었을 것이다. 그리고 여기에는 물론 자신의 ‘행동부대’인 견룡군이 총동원되었을 것이고, 거사의 주축이었던 견룡군이 계속 허승에게 붙어있는 한, 경대승은 한시도 마음을 놓을 수 없었을 것이다. 그러므로 경대승은 자신이 정국의 핵으로 부상한 이상, 이러한 위험요소들을 제거할 필요가 있었을 것이다.
여기서 우리는 경대승 특유의 ‘해결법’에 주목해야만 한다. 그는 정치적으로 그의 정적들을 다루는 대신 마치 이의방처럼 무조건 무력일변도로 상대방을 제거하려는 행동을 취하고 있는데, 이는 그가 정중부정권을 무너뜨린 직후 공포분위기를 조성한 연장선상에 있는 것이었다. 그러므로 한때 자기를 도왔던 세력들을 이렇게 냉혹하게 처리하는 스타일은 당연히 경대승에 협조적이었던 무인들의 반감을 사기에 충분했을 것이다. 다시 말해 경대승은 정적들을 대화와 타협보다는 무조건 숙청하거나 죽이는 방법을 취하여 불필요한 적들을 양산하는 결과를 자초했던 것이다. 이렇게 본다면 위의 기사에서 경대승이 역시 그의 특유의 방식대로 마음대로 정적을 죽인 다음 ‘선참후사’식 황제에게 보고하는 장면에서 허승 등을 ‘반역자’로 규정한 부분은 재고의 여지가 있다. 곧 실제로 허승이 드라마의 표현과 같이 반역을 꿈꿨다고 보기는 어렵고, 이는 경대승이 자신의 행위를 정당화하기 위해 왜곡했을 가능성이 오히려 더 높다는 것이다. 이러한 방법은 경대승의 또 다른 ‘정치 스타일’인데 그는 항상 멋대로 먼저 정적을 죽인 다음 항상 그럴듯한 이유를 붙여 황제에게 통보하고 있는 것이다. 또한 위의 기록에서 경대승이 황제의 치하를 듣고 군대의 호위를 그만두었다는 것에서 우리는 ‘도방정치’의 시초를 포착할 수 있다. 즉, 경대승은 이미 거병 직후부터 다수의 지지자들을 점진적으로 제거하기 위한 방편으로 먼저 자기 자신의 경호를 강화했던 것이다. 그리고 허승을 제거한 이후 경대승은 견룡군을 수중에 넣기를 기도했을 것이나 경대승의 허승살해는 자신들의 우두머리가 비명횡사한 이상 견룡군의 경대승에 대한 반감이 오히려 상승하는 결과가 되었을 가능성이 더 농후하다.
그러므로 허승을 제거한 직후 경대승은 자신의 지지세력으로부터도 상당한 정치적인 위협을 받기 시작했을 것이다. 여기서 경대승이 들고나온 ‘카드’가 바로 ‘복고정책’이었다. 다음의 기록을 보자.
A. 이때 경대승이 말하기를
“임금을 죽인 자가 아직도 남아 있는데 무슨 축하인가?”
라고 하였는데 이의민이 이 말을 듣고 대단히 무서워하였다. (고려사 경대승전)
B. 명종 9년에 경대승이 정중부를 처단한 후 조정 관원들이 조알하여 축하할 때 말하기를
?임금을 죽인 놈이 아직 살아 있는데 무슨 축하인가!?
라고 하였다. 이의민이 이것을 듣고 크게 겁이 나서 자기 집에 용사를 모아 두고 경비했으며 또 경대승과 도방(都房) 사람들이 제각기 꺼리는 자를 살해하려고 한다는 소문을 듣고는 더욱 겁이 나서 자기 집 문전 골목 밖에 대문을 세우고 밤이면 경비했다. 이것을 여문(閭門)이라 했는데 서울 방리(坊里)마다 모두 이를 모방하여 문을 세웠다. (고려사 권128 열전 제41 반역2 이의민)
A와 B는 경대승이 허승 다음으로 제거대상으로 삼은 이의민에 대한 증오심을 보여주고 있다. 다만 약간의 차이점은 A가 경대승의 분노만을 표시한 반면에 B는 이에 대한 이의민의 반응까지 보여주고 있다는데 있다. 그런데 B에서의 이의민의 반응은 의외로 매우 수세적이다. 왜냐하면 나중에 ‘이의민정권연구’ 편에서 자세히 밝히겠지만 이의민은 무인정변에 참여했던 다른 중추적 무인들에 비해 정치적 기반이 미약했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경대승이 ‘표적’으로 삼은 이의민은 경대승을 도운 무인이 아니었을 뿐더러 단지 속된말로 ‘몸통’ 무인이 아닌 ‘깃털’ 무인에 불과했던 것이다. 그리고 이런 이의민을 경대승은 의종을 죽였다해 반역자로 몰았고 자신의 ‘복고정책’의 희생물로 지목하기에 이르렀다. 결과적으로 경대승의 이러한 무시무시한 정적숙청방법은 B에서 보이듯이 무인들 간에 서로를 경계하고 자신을 보위하는 살벌한 풍조를 만연하게 만들었던 것이었다. 여기서 또한 우리는 경대승이 내세운 소위 ‘복고정책’이며 ‘대의’가 꼭 드라마에서처럼 순수하지 않고 다분히 정치적인 색채를 짙게 드리우고 있었다는 사실을 눈치챌 수가 있는 것이다. 더욱 직설적으로 말한다면 경대승은 허승의 제거 이후 자신이 다른 무인들로부터 고립되기 시작하자, 별다른 힘이 없던 이의민을 본보기로 삼아 무인들의 기선을 제압하고 명분을 쌓음으로써 자신의 정치적 입지를 굳히려는 노림수를 썼다고 볼 수 있다.
이와 관련하여 필자는 앞 편에서 예고했듯이 경대승 정책의 핵심이 되는 ‘복고’의 정체에 대해 구체적으로 살펴보겠다. 우선 논의의 편의를 위해 앞 편의 기록을 다시 인용하면 다음과 같다.
항상 무인들의 불법한 행동에 분개하여 개연(慨然)히 복고(復古)의 뜻이 있었으므로, 문관들이 기대어 존중히 여기었다. 또 의종을 시해한 자를 치고자 하였으나, 그 일이 어렵고 크기 때문에 표면에 나타내지 못하더니, 정중부?송유인 등을 죽이자 왕이 속마음으로는 꺼리나 겉으로는 두터운 은총을 보여서 모든 주청(奏請)을 굽혀가며 좇지 않는 것이 없었다. (고려사절요 권12 명종 광효대왕 13년 가을 7월조)
위의 기록은 경대승이 ‘복고’라는 ‘대의’로 정중부정권을 몰락시켰고 나아가 자신의 집권명분으로 삼았다는 암시를 주고 있다. 그러나 이미 앞에서 어느 정도 살펴보았듯이 경대승이 ‘복고’를 자신의 신념으로 삼아 현실에 반영한 것은 절대로 아니었다. 오히려 경대승의 이러한 조치는 정치적 경륜이 없는 젊은 장군으로서 닥치는 대로 자신의 권력을 유지하려다보니 궁여지책으로 이러한 방법을 선택했을 색채가 더 농후하다. 이러한 경대승의 ‘복고정책’의 성격을 염두에 둔다면, 위의 기록에서 문인들이 경대승에게 친밀감을 표시한 상황도 다르게 해석될 여지가 있다. 즉, 경대승의 ‘복고’가 실제로 무인정변 이전의 ‘문인시대’로 환언됨을 말했을 가능성이 농후하고, 또 실제로 기록으로 보면 그랬을 개연성이 높지만, 이는 단순히 정국을 주도하기 위한 경대승의 ‘노림수’이자 ‘정치적 슬로건’이지 그의 진심은 아니었을 가능성이 상당하다는 것이다. 더욱이 경대승이 정중부정권을 무너뜨린 동기도 사적인 원한이 배경이 되었다는 점을 염두에 둔다면 무인정변의 수혜자였던 경대승이 정말로 원해서 ‘복고’를 주창했다고 보기에는 정말 힘들다.
그렇다면 경대승이 표방한 ‘복고(復古)’는 구체적으로 무엇을 이름일까? 일반적으로 이를 무인정변 이전의 시대로 환원한다고 설명하고 있으나, ‘복고‘는 과장으로 경대승 자신의 표현이 아닌 文人들의 그에 대한 평가를 반영했다는 견해가 있다. 즉, 문인들은 ‘복고‘에 대한 자신들의 바램을 경대승을 통해 드러내었고 경대승이 고려사 반역전에 실리지 않은 까닭도 경대승 당시 문인들의 평가 때문이라는 것이다. 다음의 기록은 고려사의 찬자들이 경대승에 대해 어떠한 인식을 가지고 있었는지를 극명하게 보여준다.
정중부, 이의방, 이의민 등의 작간으로 의종을 죽이고 그들이 국권을 마음대로 뒤흔들었으니 명종의 입장으로는 마땅히 마음을 단단히 먹고 기어이 역적을 처단하고 말아야 할 것이다. 만약 역량이 미약했다면 경대승은 왕실이 쇠약함을 분히 여기고 강신(强臣)의 횡포를 증오하여 일조에 정의의 조치를 취하여 정중부의 부자를 처단하기를 마치 여우나 토끼 잡듯 하였으며 이의민이 목을 바치고 소소한 도적들은 도망을 쳐서 시골에서 숨도 크게 쉬지 못하였으니 이는 바로 현량(賢良)한 사람들을 등용하고 국가의 규율을 확립함으로써 왕실을 부흥시킬 수 있는 기회였었다. 왕은 그렇게 하지 못하고 유흥과 안일에 사로잡혀서 보통 무사한 때처럼 아무런 대책도 취하지 않았었다. (고려사 명종 28년조 史臣의 評)
위에서는 결국 명종이 경대승에게 비협조적이었기 때문에 무인정권이 지속되었다는 논리를 설파하고 있다. 그러나 실제로 경대승이 정변을 성공시킬 수 있었던 것은 일부 무인들의 협조 때문이었는데, 앞에서도 언급했듯이 이들은 모두 무인정권과 밀접한 관련이 있었다. 그러므로 경대승이 무인정권을 부정하는 ‘복고‘를 주장했다는 것은 현실적으로 불가능한 상황이었다. 설사 경대승이 무인정권에 대해 다소 부정적인 태도를 견지했을지는 몰라도 무인정권 자체를 부정하지는 못했을 것이다. 이는 경대승이 집권한 뒤에 국가권력을 왕에게 돌려주지 않고 자신이 집정하는 새로운 무인정권을 세운 데서도 명백히 드러나는 사실이다. 그러므로 경대승의 ‘복고‘ 운운은 명백한 기록적인 과장임이 분명하다. 다만, 경대승이 집권하는 과정에서 보여준 무인정변의 주축세력에 대한 부정적인 태도는 역으로 무인들에게 경대승 자신이 부정적인 인물로 비쳐졌을 여지가 농후했을 것이다. 그리고 이것이 대세를 이루어 경대승 지지세력마저 압도함으로써 경대승정권의 불안요인으로 존속했을 것이다.
그러므로 경대승이 돌파구로 내놓은 ‘복고’ 정책은 오히려 부메랑처럼 자신에게 돌아와 안위를 위협하는 지경에까지 이른다. 다음의 기록을 보자.
무관 중에서 공개적으로 말하기를
“정시중(鄭侍中)이 선참으로 대의의 기발을 들고 문관을 억압하여 우리들이 여러 해 쌓였던 분을 풀어 주어 무관의 위력을 과시한 공이 막대하거늘 이제 경대승이 하루아침에 대신 4명을 죽였으니 누가 그를 처단하려는가?”
라고 하는 자도 있었다. 경대승이 겁이 나서 결사대 백 수십 명을 모집하여 집 안에 두고 불의의 사변에 대비케 하였다. 그리고 이것을 도방(都房)이라고 불렀으며 긴 베개와 큰 이불을 만들어 주고 주야 교대로 일숙직을 하라 하였으며 혹은 자기도 그들과 한 이불 속에서 자면서 성의를 보였다. 얼마 후에 사직하고 집에 있었으나 국가에 큰 일이 있으면 반드시 대궐로 나가서 결정을 내렸다. (고려사 경대승전)
이 기록은 경대승의 도방창설의 배경을 알려주고 있다. 그것은 다름 아닌 자신의 신변을 안전하게 보전하기 위해 설치된 것이었는데, 그 동기는 바로 정중부를 동정하는 일부 무인들의 위협에서 비롯되었다. 그런데 여기서 위의 기록을 좀더 세밀히 살펴보자. 경대승이 도방을 설치한 계기는 앞서 언급했듯이 불만세력의 위협에 대비하기 위해서였는데, 만약 그 불만세력이 대수롭지 않았다면 도방설치와 같은 파격적인 조치를 취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러므로 경대승이 집권 직후 나타난 불만세력은 분명 경대승에게 충분한 위협이 되고도 남았을 존재였을 것이다. 위의 기록에서 그들이 ‘공개적‘으로 불만을 토로했다는 자체가 그러한 배경을 가지고 있었음을 시사해준다.
그렇다면 위의 ‘불만세력‘은 구체적으로 누구였을까? 일단 경대승의 정변 때 그를 지지했던 일부 무인들이 새삼스럽게 이런 말을 할 리는 없었을 것이다. 그러므로 당연히 ‘불만세력‘은 정중부의 잔당들이었을 것인데, 경대승이 정중부를 제거했음에도 이들이 남았던 것은 그만큼 비록 일부 무인들이 경대승을 지지했더라도 정중부의 잔당세력까지 제거할 정도로 정변은 완벽하지 못했다는 것을 반증해준다. 즉, 경대승은 적대세력들을 축출할 만큼 강력한 정권을 세우지 못했는데 그 이유는 이미 무인정변의 행동집단은 경대승이 제어할 수 없을 정도로 정치적으로 성장해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이 같은 적대세력의 기반은 경대승의 죽음 이후 재기의 발판이 되기도 하는 것이다. 경대승이 도방과 같은 사적인 기구를 설치한 것도 결국 이들 정적들이 있는 중방 같은 공적 기구를 신뢰할 수 없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사실 경대승이 집권한 이후 이전과 마찬가지로 무인정변때의 무인들이 장악하고 있었는데, 그 이유는 당연히 이들이 경대승의 집권을 도왔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미 약 10년 동안 정치의 잔뼈가 굵은 이들은 일단 송유인 같이 자신들에 위협을 주는 존재를 경대승을 내세워 제거하자 이제 정치경험이 전무한 젊은 장군을 견제하고자 허승을 내세웠다가 이마저 실패하자 노골적으로 전면에 나서서 경대승을 위협하기 시작한 것이었다. 이는 모두 자신들의 기득권 유지를 위한 고도의 정치적 전략이었던 것에 다름이 아니었다.
자신에게 협조적이었던 무인들과 정중부정권의 잔당 이외에도 경대승의 정적은 이의민 계열의 무인들이 있었다. 고려사 경대승전에 보이는 ‘학식과 용략이 없는 자‘들은 주로 무인정변에 참여했던 행동집단의 무인들, 특히 이영진 같은 이들을 가리킨 것으로 보인다. 고려사 이영진전에 이영진이 경대승의 집권기동안 위축되었던 상황을 보여주는데, 천민출신의 이영진과 여러모로 같은 처지였던 이의민 또한 이영진 등에게 적대적이었던 경대승의 정적이 되었음은 자명하다 하겠다. 여기서 우리는 경대승의 또 다른 어두운 일면을 볼 수가 있는데, 그가 이의민 등을 배척한 이유가 위에서 언급한 것들도 포함이 되지만 바로 신분적인 편견이었을 가능성도 농후하다는 사실이다. 다시 말해 ’귀족‘ 출신인 경대승의 눈에는 ’천민‘ 출신인 이의민 같은 자는 마땅히 배척받아야 마땅하다고 보였을 법도 하였을 것이라는 것이다. 이 같은 설정은 그가 과연 드라마에서처럼 공평무사하게 백성을 생각하는 ’청년 호민관‘이었을까 하는 문제를 다시금 생각해 보게 한다.
다만 의종시해문제는 이의방?정중부 정권에 대한 정당성과 도덕성의 문제를 야기시켜 이들 정권이 단명하는 요인 중의 하나가 되었고, 경대승은 이러한 의종시해의 부당성을 강조해 이들 잔당의 준동을 막고자 하는 의도가 분명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이의방?정중부?이의민은 의종시해자라는 공통된 약점으로 인해 문무의 대립을 유지하고 무인을 결속함으로써 그들의 협조에 의해 권력을 유지하려고 시도했다. 반면 경대승의 복고적 의도는 이전의 정권과 차별성을 강조하고 그것으로 그때까지 소외되었던 세력들을 규합하여 우군으로 삼기 위한 의도도 없지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정중부가 이의방을 제거한 뒤에 정권을 잡고 의종을 복권시키는 조치를 취했기 때문에(?高麗史節要? 권12 명종 광효대왕 5년 5월조 참조) 경대승이 의종시해를 명분의 하나로 삼아 정중부를 제거했다는 것은 설득력이 떨어진다. 실제로 앞에서도 언급되었듯이 경대승의 정변동기로 정중부정권에 의종시해의 책임을 묻는 부분은 보이지 않는다. 다만 막연히 ‘의종을 시해한 자‘라고만 했으나 이는 구체적으로 이의민을 가리키는 것이라고 생각된다. 하지만 이의민에 의한 의종의 살해는 무인정변과 이후의 무인정권 성립에 기여한 무인들의 의사가 집약된 행동이었기 때문에 이의민에 대한 경대승의 비난 또한 이들 모두를 겨냥한 것으로 볼 여지 또한 있다.
이러한 복합적인 요인들이 모여 결국 경대승은 ‘도방’이라는 자신의 경호 친위대를 만들어 자신의 집권을 도와주었던 무인들까지 포함하여 많은 정적들과 힘겨운 투쟁을 벌이는 위치에 직면하게 된다. ‘도방’은 앞서 ‘정중부정권연구’에서도 보았듯이 정중부정권의 말기적 상황에서 무인들이 자신들의 세력확장을 위해 여러 방랑무사들이나 오늘날로 말하면 ‘조폭’급 무인들을 모아 사병화한 상황의 연장선상에서 경대승 자신이 엄선하여 자신의 호위를 맡긴 지극히 사적이고 폐쇄적인 집단이었다. 따라서 ‘도방’은 긍극적으로 경대승 자신의 마지막 정치적 선택이었고 이제 한 치도 물러설 수 없는 상황에서 이 젊은 장군은 자신의 창조물인 도방에 전폭적인 신뢰와 지원을 아끼지 않을 수밖에 없는 처지가 되는 것이었다. 그리고 경대승의 도방에 대한 과도하고도 맹목적인 집착은 결국 도방은 물론, 자신의 운명을 재촉하는 ‘몰락’의 여정으로 이끌게 되는 것이었다.
무인정변의 대표적 수혜자로 기득권을 누리고 있던 경대승은 그러나 자신의 사적인 원한으로 젊은 혈기를 누르지 못하고 배후세력의 지원에 힘입어 송유인이 버티고 있던 정중부정권을 무너뜨리는 놀라운 과단성을 보여주었다. 당시 이것이 가능했던 이유는 앞에서 장황하게 열거한 점들도 있겠지만 경대승에게 어느 정도 운도 작용하고 있었던 사실은 부인할 수 없겠다 하겠다. 그러나 그의 행운은 여기까지였다. 막상 무인정권의 새로운 ‘집권자’가 된 그는 무늬만 집권자였지 실상 계속 다른 무인들의 도전과 견제에 정치적으로 수세에 몰리게 되었다. 이는 경대승 자신이 무력과 전략적인 재능은 뛰어났을 수도 있었겠지만 정치적 경륜의 한계를 드러냈기 때문이다. 그가 이를 타개하기 위해 내놓은 여러 방책들은 미봉책에 불과했고 특히 ‘복고정책’ 같은 경우는 오히려 사태를 악화시키는 결과만을 초래했다. 다른 무인들로부터 완전히 ‘왕따’를 당한 경대승은 이제 자신의 신변마저 걱정해야 하는 위치에 도달했고 마지막 선택으로 자신의 휘하 ‘특수경호부대’인 ‘도방’을 설치하기에 이른 것이었다. 사실 송유인 같은 ‘정치 9단’도 어떻게 하지 못했던 당시 정세를 정치경험이 전무한 청년장군에게 개선하기를 바랬다는 것 자체가 무리였을 수도 있겠다. 그러나 경대승이 마치 드라마처럼 정치에 무관심한 처지였다면 몰라도 그가 바로 ‘정치군인’이었다는 데 문제의 심각성이 있었다. 그렇다면 도방 설치를 전후한 기록을 다시 한번 보기로 한다.
무관 중에서 공개적으로 말하기를
“정시중(鄭侍中)이 선참으로 대의의 기발을 들고 문관을 억압하여 우리들이 여러 해 쌓였던 분을 풀어 주어 무관의 위력을 과시한 공이 막대하거늘 이제 경대승이 하루아침에 대신 4명을 죽였으니 누가 그를 처단하려는가?”
라고 하는 자도 있었다. 경대승이 겁이 나서 결사대 백 수십 명을 모집하여 집 안에 두고 불의의 사변에 대비케 하였다. 그리고 이것을 도방(都房)이라고 불렀으며 긴 베개와 큰 이불을 만들어 주고 주야 교대로 일숙직을 하라 하였으며 혹은 자기도 그들과 한 이불 속에서 자면서 성의를 보였다. 얼마 후에 사직하고 집에 있었으나 국가에 큰 일이 있으면 반드시 대궐로 나가서 결정을 내렸다. (고려사 경대승전)
위의 기록에서 몇 가지 특기할 만한 부분이 있는데, 먼저 경대승이 ‘사직’을 했다는 사실이다. 우리는 흔히 경대승이 집권한 이후 조정에 전혀 출사하지 않았다고 생각하는데, 분명 그는 ‘청주변란’ 때 파직된 이후 관직을 받은 기록이 나타나지 않는다. 그렇다면 그가 ‘사직’했다는 언급은 분명 경대승이 집권한 이후 어느 시점에 이르러 관직을 받고 조정에 출사했다는 말이 된다. 이는 경대승이 드라마에서처럼 ‘대의’를 중시해 전혀 권력에 관심이 없었다는 관점과는 거리가 있다.
그렇다면 그가 ‘사직’하고 때때로 ‘무관의 제왕’처럼 조정 일에 관여했다는 표현은 어떻게 이해하여야 할까? 여태까지 전개된 본고의 논지의 연장선상에서 이를 논한다면 역시 색다르게 해석할 여지가 있다. 즉, 경대승의 저돌적이고 다소 ‘거만한’ 성격으로 미루어보건대 경대승은 당시 자신을 압박하던 무인들에 대한 항의와 자신의 상처받은 자존심의 표시로 의도적으로 이러한 제스쳐를 구사했을 가능성이 있다. 즉, 자신이 다른 무인들보다 우월한 환경의 출신이고 심지어 황제까지 자신에게 굽실거리는 현실을 노골적으로 과시하고 싶은 의도가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이에 그는 허수아비 황제가 다스리는 조정을 통째로 무시하고 싶은 욕구불만의 표시로 이러한 행동을 취했을 수도 있다. 그러나 이는 결국 허장성세에 불과한 것으로 명분적으로 경대승 자신의 욕구불만 해소에는 다소나마 도움이 되었을지도 모르나 현실적으로 이는 아무런 소용이 없는 짓이었던 것이다.
경대승이 도방을 설치한 이후 생각해낸 또 하나의 대응방법은 바로 문인들에 대한 우대정책이었다. 문인들은 1170년 이후 한번도 무인들에게 제대로 대우받은 적이 없었는데, 이때에 와서 경대승에 의해 조정의 요직에 진출하기 시작한 것이었다. 이에 문인들이 받았을 경대승에 대한 ‘감격’과 ‘고마움’을 우리는 충분히 상상할 수 있을 것이다. 이들에게 경대승은 그야말로 ‘구세주’에 다름이 아니었을 것이고 이러한 경대승에 대한 호의적인 감정이 나중에 역시 문인들이었던 조선시대 고려사의 찬자들에게까지 전해졌을 것이다. 그러나 경대승이 정국을 완전히 장악하지 못한 상황은 경대승정권의 문인정책에서도 여실히 드러난다. 다음의 기록들을 보자.
A. 11월 임자일에 새로 지은 경인전(康仁殿)이 완공되었다. 이전에 정문 현판을 嚮福이라고 하였었는데 그 정문이 重房 동쪽 모퉁이와 접근해 있었으므로 무관들의 의견에?향복?은?항복?과 음이 비슷하니 대개 문관들이 이것으로써 무관을 위압하여 항복시키려는 것이라고 생각하여 왕에게 그 현판을 고치자고 청하였다. 왕이 평장사 민영모에게 명령하여 永禧로 고치게 하였더니 무관들이 또 말하기를?문관들의 생각을 추량할 수 없은즉?영희?에 따로 깊은 뜻이 함축되어 있음을 어찌 알겠습니까? 희(禧)는 복 희 자이나 영(永) 자 뜻의 길흉(吉凶)을 알 수 없고 중(重) 자는 본방(本房-중방)의 명칭이니 중희(重禧)로 고치기를 바랍니다?라고 하니 왕이 이 제의를 좇았다. (고려사 명종 신축 11년조)
B. 5월 병술일에 중방에서 동반(東班) 관직을 줄이라고 하였다. (고려사 명종 계묘 13년조)
C. 12월 임자일에 의종의 화상을 효안사(孝安寺)로 옮겼다. 처음에 서쪽에 있는 해안사(海安寺)에 화상을 두었었는데 이때에 와서 무신들이 의논하기를 의종은 무인을 원수로 여겼으니 그 화상을 무방(武方)에 두는 것이 적당하지 않다고 하여 드디어 왕에게 제의하여 성 동쪽에 있는 오미원(吳彌院)을 선효사(宣孝寺)로 개칭하고 거기에 진전(眞殿)을 지어 의종의 화상을 옮겨오고 해안사는 중방의 원당(願堂)으로 지정하였다. (고려사 명종 신축 11년조)
실제로 경대승의 집권기간 동안 많은 문인들이 과거에 응시하고 합격한데서도 당시 경대승정권의 분위기를 읽을 수가 있다. 그러나 위의 기록들에서 보이듯이 문인들의 등용이 곧 무인들의 세력약화를 뜻하는 것은 아니었다. 당시 경대승과 더불어 집권하여 권력을 양분했던 무인들은 국왕과 문인들의 밀착을 항상 견제?탄압하였고 무인들의 불법과 부당한 인사(人事)에 대한 대간(臺諫)의 논란은 그들에 대한 도전으로 간주되어 응징하곤 하였다. 오히려 무인들은 가능한 한 많은 동반(東班) 관직을 차지하여 그들의 권력을 강화하려 시도하기도 하였던 것이다. 따라서 비록 경대승 자신의 뜻은 아닐지라도 그가 무인들을 완전히 장악하지 못했기 때문에 A, B, C와 같은 무인들의 문인에 대한 압력이 가능했을 것이다.
경대승이 집권한 이후 당시 황제인 명종과의 관계도 많은 문제점이 있었다. 앞에서도 보이듯이 명종이 겉으로는 경대승에 순응하면서도 내심 그를 꺼린 이유는 두말할 것도 없이 명종 자신이 무인정변의 산물로 경대승에 반대하던 무인들과 공동운명체였기 때문이다. 더군다나 경대승이 의종시해에 대해 부정적인 입장을 보인 것은 간접적으로 명종에 대한 위협으로 보여질 여지도 충분했다. 그러므로 이의민이 경대승정권 하에서도 건재할 수 있었던 요인은 비단 같은 처지의 무인들과의 연계성도 있었겠지만 명종의 이의민에 대한 비호 또한 중요한 요인이었을 것이다. 명종과 이의민은 의종시해에 관해서는 입장을 공유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어쨌든 정권의 중요한 지지자 역할을 하는 황제가 사실상 경대승에 반감을 가지고 있었다는 것 자체만으로 경대승정권은 그 운영에 또 다른 차질을 빚게 되는 것이었다. 명종의 경대승정권에 대한 반감은 뒤에서 곧 보이듯이 경대승의 죽음 직후 도방에 대한 황제의 혹독한 조치로 표출되기에 이른다.
경대승정권의 지방정책에서도 이전의 무인정권들과의 차별성은 별로 보이지 않는다. 대표적인 예로 다음을 보도록 하자.
D. 9월 병자일에 왕이 조서를 내리기를?내가 듣건대 지난 연간에 10道의 찰방사(察訪使)들이 지방 관리들에게 적용하였던 상벌에는 잘못된 것이 많았다고 하니 표창을 잘못 받은 것은 오히려 괜찮거니와 책벌을 잘못 받고 억울한 사정을 호소할 곳이 없는 자는 애석하지 않겠느냐? 그들을 일체 용서해 주고 전과 같이 벼슬을 주라!?고 하는 동시에 명령을 내려 참형, 교형 이하 죄수들의 형을 전부 면제하여 일정한 지역으로 보내게 하였다. 이에 앞서 지난 무술년에 재상 송유인, 이광정 등의 건의에 의해서 10개 道에 찰방사를 보내 그들로 하여금 지방 관리들에게 상벌을 적용하게 하였었는데 그때 장물죄에 걸려서 관직을 빼앗긴 자가 9백 90여 명에 달하였다. 그들을 몽땅 범죄자 명부에 올렸더니 그들이 은 50여 근을 공동으로 거출하여 정중부에게 뇌물을 주고 명부에서 이름을 삭제하여 달라고 하였으나 중부가 약속을 이행하지 못한 채 실권을 하였다. 이때로부터 권세 있는 고관들에게 뇌물을 크게 먹이면서 이름을 빼 달라고 하였으나 국가 법령을 공공연하게 위반할 수 없었기 때문에 그들의 성명을 삭제하지 못하였던 것이다. 이때에 이르러 집권자들이 말을 꾸며 ?천벌이 빈번하고 거짓말이 더욱 많이 떠도는 것은 다 억울한 죄명을 쓴 자들이 있기 때문?이라고 하였으므로 왕이 조서를 내려 그들의 죄를 용서한 것인데 대각(臺閣)에서는 말 한마디도 하지 않았다. 사리를 아는 인사들은 이를 탄식하였다. (고려사 명종 신축 11년조)
위의 기사는 정중부정권때 출척된 지방관들을 복권시키는 것인데, 원래 출척된 지방관들은 민폐의 원인이었던 지방관과 봉사자(이속층)들을 대상으로 하였다. 초기 무인정권에서의 지방관 증치와 안찰사?찰방사 등의 파견은 그러한 원인을 제거하여 나름대로 지방사회의 안정을 구가하려는 의도가 있었다. 그러나 경대승 집권기에 이루어진 출척된 지방관의 맹목적 환원은 이 시기 무인정권의 지방정책의 파행성을 보여줌과 동시에 이로 인한 대대적 반발로 확고한 정치적 지지기반이 취약했던 경대승에게는 부담이 되었을 것이다. 이러한 경대승정권의 미온적 태도는 지방정책의 혼란을 야기시켰으며 지금까지 누적되어온 지방관과 이속층의 탐학을 더욱 부채질하여 지방사회의 새로운 갈등의 배경이 되었다.
이 당시 지방정책의 혼선은 명종대의 감무(監務) 파견의 실태를 통해서도 알 수 있다. 속현에 파견된 관리인, 즉 외관(外官)이었던 감무는 명종 2-6년 사이에 66현에 증치(增置)되었다. 감무는 속군(屬郡)에 우선적으로 설치되어 속군과 속현(屬縣)간의 등급차를 보여 일정한 체계성이 부여되고 중앙에서 감무설치를 계획적으로 시도한 것이었는데, 이는 무인들의 정권독점으로 정치적 견제나 타협 없이 대량파견이 가능했기 때문이었다. 감무는 권신들을 위하여 토지와 전민을 탈취하여 권문에게 상납했고, 권신들은 자신들의 기반을 확보해주는 감무를 실지 자신이 추천하여 사용하기도 하였다. 또한 집권무인들은 독자적인 무력기반으로서의 사병의 양성에 주력하고 있었는데, 사병집단의 유지비는 집권무인들의 농장으로부터 충당되어 대토지겸병현상이 심화되었다.
그런데 경대승의 도방설치로 본격적인 사병집단이 출현하면서 이와 같은 지역적 수탈은 한층 강화되었을 것이다. 이러한 일반적 추세에 따라 경대승이 정중부를 제거할 때도 외관(外官)들이 바뀌었을 것으로 예상할 수 있는데 결국 이러한 정책들은 전체국가체계를 사적 체계로 바꾸는 현상을 야기하기에 이르렀다. 따라서 경대승의 집정 기간 동안에도 이와 같은 지역적 수탈에 반발하는 진주지역의 봉기, 관성현(管城縣)과 부성현민(富城縣民)의 봉기, 전주(全州) 관노(官奴)의 난 등이 연이어 발발했다. 물론 당시 경대승이 사실상 명목상의 집권자에 불과했고 고려의 전권을 장악하지는 못했기 때문에 이러한 일련의 부정적인 정국의 흐름이 모두 그의 책임이라고 할 수는 없을 것이다. 그러나 당시 권력자의 상징이었던 그가 그 이유야 어떠했던 간에 결과적으로 ‘도방’ 등으로 권력의 사유화를 부채질했다는 혐의는 벗어나기 어려운 것이다.
실제로 경대승이 ‘도방’을 구축한 이후 경대승의 전폭적인 신임을 등에 업은 도방의 ‘만행’은 심지어 경대승에 호의적인 고려사의 찬자들의 기록에서도 보이기 시작한다. 그러므로 도방의 불법적인 행위 기록은 충분한 객관성을 보장하는 것이다. 비록 경대승이 자신의 안전을 위해 도방을 설치한 불가피한 측면을 감안하더라도 과연 ‘도방’이 드라마의 묘사와 같이 ‘정의의 집단’이었는지 아니면 단순한 ‘권력을 빙자한 폭력집단’이었는지는 밑의 기록을 통해 여러분이 판단해보기 바란다.
경대승이 정중부 송유인 등을 처치한 후로는 항상 마음이 불안하여 언제나 몇 명의 문객을 거리로 보내 유언비어를 탐문하고는 즉시 관계자를 잡아 가두고 국문하여 여러 번 큰 옥사를 만들어 가혹한 형벌을 적용하였다. 그때에 서울에는 도적이 많이 생겼는데 자칭 경대승의 도방이라는 이름을 붙이고 다니었다. 법관이 이런 자들을 잡아 가두면 경대승이 즉시 서강시켰다. 이런 까닭에 그들은 아무 꺼림 없이 공공연히 약탈을 감행하였다. 경대승의 문객 한 사람이 길에서 양가집 자제를 죽인 사건이 발생하였다. 법관이 체포하여 치좌하려 하였으나 경대승이 극력 주선하여 무사하게 만들었다. (고려사 경대승전)
위의 기록에 따르면 경대승의 도방은 실로 무소불위의 권력을 휘두르며 백성들을 괴롭히는 존재로 보인다. 그리고 심지어 사람들을 마음대로 죽이며 법까지도 무시하는 무정부적인 행태를 남발하고 있는 것이다. 이는 황제를 무시하고 관직도 없으면서 마음대로 조정에 출입해 나라의 기강을 어지럽히는 경대승 자신의 연장선상에 있는 것이기도 했다. 그러나 도방에 소속된 자들이 경대승에게 절대적인 충성을 바치고 그를 열성적으로 보호하는 한, 이 모든 것이 용서되었다. 그야말로 ‘도방’은 심하게 말하면 권력에 기생하여 백성들을 등쳐먹는 전형적인 예였던 것이다.
그런데 이러한 혼란상의 와중에 다음과 같은 흥미로운 기록이 보인다.
11년에 전(前) 대정 한신충(韓信忠), 채인정(蔡仁靖), 박돈순(朴敦純) 등이 반란을 음모하는 것을 영사동정(令史同正) 대공기(大公器)가 알고 경대승에게 밀고하였다. 경대승이 왕에게 고하여 붙잡아 국문하니 석화(石和)와 별장 박화(別將朴華), 주부 이돈실(注簿李敦實)도 이 사건에 관계가 있는 것이 발각되었으므로 한신충, 채인정, 박돈순 등은 섬으로 귀양 보내고 석화(和)는 남해 현령(南海縣令)으로 박화(華)는 하산도 구당사(河山島勾當使)로 강직시켰으며 이돈실은 광주(廣州)로 귀양 보냈다. 왕이 내심으로는 경대승을 꺼리었으나 외면으로는 두터운 은총을 베풀어 날마다 진수성찬과 의복, 보화를 주며 그의 청하는 일이면 좋지 않은 일이라도 허락 아니 한 것이 없기 때문에 그에게 접근하려는 사람이 많았다. 그들은 모두 학식과 용략(勇略)이 있는 사람들이었으나 경대승이 매번 거절하였으므로 무관들도 그의 위엄에 눌러서 함부로 방자스러운 행동을 하지 못하였다. (상동)
위의 기록이 흥미로운 이유는 위에서 보이는 반란 사건이 경대승정권에서 보이는 유일한 조정의 권력다툼기사이기 때문이다. 얼핏 보면 위의 반란을 진압하는 데에 경대승이 주도적인 역할을 한 것처럼 보이나 그동안 우리가 조사해본 바에 따르면 이 기록의 이면을 보다 자세히 관찰할 필요가 있을 것이다. 곧 당시 고려의 권력은 경대승이 혼자 독차지하고 있지 않았다. 다시 말해 경대승과 기타 무인세력이 양분하고 있었고 오히려 기타 무인세력들이 경대승을 압도하고 있던 형국이었던 것이다. 그러므로 위의 반란기록이 과연 경대승을 대상으로 했던 것인지를 재고할 필요가 있다는 것이다. 그런데도 경대승이 나서 이를 진압하는 것은 바로 경대승 자신을 압도하던 무인세력들이 배후에 있었기 때문이 아닐까 한다.
즉, 필자의 추측으로는 당시 실권을 거의 잃어버린 경대승이 무인세력들의 제안을 받고 협상적인 차원에서 대신 나서서 이 반란을 진압했을 것이라 본다. 무인세력이 경대승을 이용한 이유는 이미 경대승이 대다수 무인들의 인심을 잃고 있었기 때문에 더 이상 손해 볼 측면이 남아있지 않았기 때문이 아니었을까 한다. 게다가 이 반란의 무리들은 정중부의 잔당으로 추정되는데, 당시 무인세력의 대다수는 비록 경대승과 척을 지고 있었으나 그들 역시 정중부의 잔당들과도 원수관계에 있었기 때문에 무인들간의 다툼이라는 안 좋은 모양새를 피하기 위해 무인들의 세계에서는 이미 ‘반동적’인 존재였던 경대승을 내세운 것이 아닌가 한다. 이렇게 본다면 경대승 자신은 자신이 그토록 혐오했던 정중부와 마찬가지로 마치 정중부가 이의방, 정균, 송유인의 ‘얼굴마담’으로 역사에 남았듯이, 경대승도 이들 무인세력의 ‘얼굴마담’으로 이때에 와서 전락한 것이 아닌가 하는 의문 또한 드는 것이 사실이다. 이렇게 본다면 이는 대단한 역사의 아이러니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위의 기록에서 보이는 경대승에 대한 찬사 역시 고려사 찬자들의 과장이라고 할 수 있으며 실제 사실이라 보기는 어려울 것이다. 기실 지금까지 경대승의 행적을 살펴보면 과연 그가 무인시대의 역대 집권자 축에 넣을 수 있을까 하는 회의까지 드는 것이 사실이다.
이렇게 사실상 모든 권력집단으로부터 외면 받고 오로지 자신의 사적인 충성집단인 ‘도방’에 의지하여 신변안전에만 급급한 것 이외에 별다른 운신이 없었던 경대승에게도 급기야 최후가 다가왔다. 먼저 무인시대의 최고 미스테리 중의 하나인 그 기록부터 보도록 하자.
E. 13년(1183년)에 경대승이 홀연 꿈에 정중부가 칼을 들고 호통치며 달려드는 것을 본 후에 병을 얻어 죽었다. 그의 나이 30세였는데 그의 장례식에는 길가에서 통곡 아니 하는 사람이 없었다.
처음 경대승이 정중부를 처단할 때에 견룡(牽龍) 김자격(金子格)의 협조한 힘이 많았으며 경대승이 그를 사랑하여 도방(都房)을 통솔하게 하였다. 경대승이 죽자 도방에서 돈을 추렴하여 장사를 지내고 나서 해산을 앞두고 전원이 다시 모여 술을 마시었는데 김자격이 이것을 구실로 삼아 왕에게 무고하기를
“경대승의 도방이 이따금 집합하는 것은 앞으로 반란을 음모하는 것입니다”
라고 하였다. 왕이 평소에 경대승을 꺼리고 있었으므로 중방(重房)에 명령하여 대장군 정존실(鄭存實), 오숙(吳淑) 등으로 하여금 그들을 치죄케 하였다. 만약 도방 명단에 이름이 실린 자라면 모조리 체포하였다. 그 중에 혹 도망가서 숨은 자가 있으면 그의 보모 처자나 일가친척들을 붙잡아다가 곤욕을 주었으므로 숨었던 자도 부득이 자수하거나 혹은 자살하였다. 그래서 무릇 6십여 명을 체포하여 가두고 또 다시 정존실 등에게 지시하여 심한 고문을 가하게 하고 그의 도당들을 엄중 수색하게 하면서 일변으론 내관(內官)을 보내 고문을 가혹하게 하는가 안 하는가를 엿보게 하였다. 이런 까닭에 매질과 고문이 너무 혹독하였으며 모조리 먼 섬으로 귀양 보냈는데 대부분이 도중에서 죽고 생존자는 불과 4, 5명이었다. (상동)
F. 8월 무신일에 경대승의 都房에 속한 사람들을 체포하여 모두 먼 섬으로 귀양보냈다. (고려사 명종 계묘 13년조)
과연 누가 어떻게 경대승을 죽였을까? 경대승이 자신의 신변안전만을 위해 그 모든 악행을 묵인하면서까지 만든 ‘도방’에 에워싸인 폐쇄적인 구조로 미루어볼 때 외부에서 경대승을 암살했을 가능성은 아무래도 희박하다 하겠다. 사실 E같은 기록은 기록 자체가 매우 은유적으로 되었기 때문에 경대승의 죽음과 관련된 여러 가지 가설이 가능한 형편이다. 우선 생각해볼 수 있는 것은 정중부 잔당의 소행이다. 그 근거는 위에서 경대승이 정중부의 귀신을 보고 죽었다는 기록인데, 당시 당대의 무인이었던 경대승이 꿈에 놀라 죽었다는 것은 아무래도 취신하기 어렵다. 그러므로 이는 나름대로의 상징적인 의미가 있는 것으로 보인다. 즉, 정중부 일당이 경대승의 죽음에 개입되었을 가능성인데, 다만 이미 앞에서 이들의 반란이 진압되었고 당시 실세는 경대승이 아니라 정중부를 제거한 무인세력들이었기 때문에 경대승이 이들의 직접적인 암살대상이었다고 보기에는 좀 어려운 것이 사실이다. 또 다른 가능성은 황제를 위시한 무인세력들인데, 이들은 공통적으로 경대승에 대해 반감을 가지고 있었다. 특히 기록들에서 나타난 경대승의 과격한 성격과 행동으로 미루어보면, 경대승은 자신의 불리한 입지를 일거에 타개할 방안으로 어쩌면 다시 한번 쿠데타를 일으켜 황제와 조정을 갈아엎으려는 음모를 꾸몄을 가능성도 있을 것이고, 이를 알아챈 황제와 조정이 먼저 손을 쓴 것이라 볼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이는 어디까지나 근거가 희박한 가설일 뿐이다.
가장 유력시되는 가능성은 역시 도방 내부의 배신자에 의한 경대승의 암살이다. 특히 위의 기록에서 경대승의 충복으로 도방을 이끈 김자격이라는 인물에 우리는 자연스럽게 시선이 간다. 사실 당시 경대승의 입지로 보아 외부세력이 이무런 실권이 없는 그를 죽여야 할 필연성은 별로 없었던 것으로 보인다. 오히려 경대승의 죽음은 도방과 관련된 내부의 이해관계에 의해 이루어진 것이 순리인 것 같다. 특히 앞서 살펴본 도방의 온갖 불법행위에 도방의 방주였던 김자격이 무관하다고 볼 수는 절대로 없을 것이다. 비록 경대승에 관한 기록이 고려사의 찬자들에 의해 다소 미화되었고 따라서 김자격에 대한 폄하기록의 과장이 있었을 여지는 농후하지만, 김자격이 배신한 것 자체까지 왜곡할 수는 없었을 것이다. 그렇다면 이는 명백한 사실인 것이다. 이로 미루어보건대 김자격은 매우 음흉한 인물이었던 것을 알 수 있으며 이러한 인물을 중용한 경대승의 됨됨이도 우리는 추측해볼 수 있는 것이다.
즉, 이러한 추정을 근거로 경대승 죽음 당시의 상황을 재구성해본다면 아마도 당시 도방을 이끌던 김자격이 이제 경대승의 최후가 다가옴을 직감하고 미리 조정에 줄을 대어 내통하고 경대승을 독살한 것일 것이다. 기록에 경대승이 정중부의 환영을 보았다는 것은 아마도 경대승이 독살된 상태에서 약효로 스스로 뇌까렸거나, 아니면 김자격이 자신의 범죄를 정중부 일당에게 뒤집어씌우려는 의도로 이렇게 소문을 퍼뜨려 이것이 기록으로 정착되었을 것이다. 위의 기록에서 도방이 그토록 경대승을 싫어하던 황제와 조정에 의해 무참하게 최후를 맞는 것과는 달리 이 도방을 정작 이끈 김자격의 최후에 대한 언급이 전혀 없는 것도 김자격이 조정과 내통했다는 반증이 되는 것이다. 이렇게 본다면 경대승은 자신이 그토록 신변을 중시해 설치했던 도방에 의해 살해당하는 어처구니없는 최후를 맞이했던 것이다.
경대승은 적어도 기록상으로 확인되는 바로는 ‘復古‘라는 집권명분이 있었던 유일한 무인집권자였다. 그러나 ‘복고‘라는 명분으로 집권에 성공한 경대승은 역으로 그 명분 때문에 대부분의 무인들로부터 외면당하고 만다. 그 결과 경대승정권은 역대 무인정권 중 지지기반이 가장 취약한 정권이 되었고, 이는 곧이어 경대승이 집권 이후에도 ‘도방정치‘로 표상되는 정권보존에만 급급한 모습을 보이는 원인이 되었다. 또한 과거로 회귀하려는 그의 보수적인 면모는 이의민이나 이영진같은 천민 출신 무인들과의 신분적 위화감을 조성했을 여지도 있었다. 이는 경대승정권의 고립화를 더욱 심화시켰을 것이다. 또한 경대승정권은 타파대상이었던 정중부정권 못지않은 무리수를 두게 되는 모순점도 표출하였다. 실제로 경대승정권이 일찍이 표방했던 ‘복고‘된 양상은 경대승의 집권기간 동안 찾기 어렵게 되었고, 경대승은 결국 초라하게 도방에 의존하고 집착함으로써 私의 논리가 오히려 이전보다 강화되었던 것이다.
결국 경대승정권의 몰락은 미약한 지지세력과 더불어 집권에 대한 자신감의 상실에서 연유했다고 볼 수 있는데, 그의 집권은 순리가 아닌 당시의 대세에 역행하는 측면도 있다. 비단 무인들의 입장에서만의 ‘반동적‘ 정권이 아니라 당시 역사발전의 추세에 역행했기 때문에 어쩌면 역대 무인정권 중 가장 모순적인 모습을 보여주고 또 단명을 면치 못했나 하는 생각도 든다. 보수적인 성격의 인물에 의한 집권은 최충헌에 이르러서야 가능하게 되었는데, 이때는 무인정변을 성공으로 이끈 무인들이 정권을 장악하여 극심한 변화를 경험한 이후, 즉 그들의 정권장악에 대한 반대여론이 비등해진 연후에야 보수적 인물의 집권이 가능했던 것이다. 사실 경대승과 최충헌은 도방, 문인등용, 무인탄압 등의 측면에서 공통점을 가지고 있다. 최충헌이 경대승의 시행착오를 참고하여 위와 같은 정책을 실행했을 가능성도 농후하다. 그러한 측면에서 경대승정권의 영향과 의의도 결코 적다 할 수는 없을 것이지만 당시 고려사회의 발전적 전개에 있어서 경대승정권은 여느 다른 무인정권보다도 심한 모순성을 내포하고 있었다고 본다. 그것이 결국 경대승정권의 한계였던 것이다.
또한 경대승은 소위 말하는 ‘귀족적인’ 환경에서 자라나며 아마도 ‘노빌리스 오브리제’를 ‘청주변란’과 같은 때를 전후하여 구상했을 법도 하다. 그러나 정작 집권을 한 이후에는 줄곧 무인세력들에 의해 이용만 당하는 처지로 전락한 인상을 짙게 주었기 때문에 설사 그러한 생각이 있었다 해도 현실적으로 백성을 위한 정치를 구현한다는 것은 불가능했을 것이다. 여기서 우리는 경대승정권의 또 다른 교훈을 얻을 수가 있다. 그것은 아무리 꿈이 장대하다 해도 현실적으로 준비가 안 된 지도자가 권력을 잡았을 때 오히려 일반 백성들에게는 재앙으로 화하여 다가온다는 사실이다. 이는 오늘날의 상황과도 무관하지 않다. 이리하여 고려는 경대승의 죽음 이후 다시 ‘고려판 전두환’이라 불릴만한 이의민에 의해 장악되어 무인들의 자웅을 겨루는 시대로 복귀하게 되는 것이었다.
출처 : http://www.sunslife.com/bbs/zboard.php?id=4003&page=2&sn1=&divpage=1&sn=off&ss=on&sc=on&select_arrange=hit&desc=desc&no=26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