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대승 이야기
청주경씨.
-경진의 아들.
-15세때 음서로 발탁되어 교위(정9품)에 임명되었을 정도로 절등한 용력을 지녔다. 일찍이 역사,병법,천문,지리를 깨치고 옥골선풍의 외모와는 달리 무예로 감히 대적할 자가 없었던 문무를 겸비했던 인물.
-17세때 무신정변을 맞이했다.아버지 경진이 정중부의 측근세력으로 참여하여 출세가도를 달렸지만 그는 오히려 권력실세들의 전횡을 보며 무신정권에 회의와 반감을 품게된다. 아버지가 권력의 실세였다는 것이 그에게는 고통이었다.
-의종이 시해되자 그의 회의는 무신권력에 대한 적대감으로 바뀐다. 반역자 이의방과 이의민을 암살하려는 계획을 세웠을 때 만류한 사람은 두경승이었다. 두경승은 그에게 정신적인 지주가 되어주었다. 그러나 경대승은 두경승의 그늘속에 머물기에는 뜻이 큰 인물이었다. 두경승이 무인의 길을 택한 반면 경대승은 천하를 경륜하려는 포부를 지니고 있었다.
-경진이 사망하고 그 뒤를 이어 청주의 사심관으로 임명되자 아버지가 불법적으로 탈점한 군인전을 반환한다. 경대승의 파격적인 토지반환은 당시 권력측근들의 군인전탈점에 불만을 품고 있던 청주군인들을 자극하였다. 경대승은 더 나아가 청주군인들을 교묘하게 선동하여 다른 군인전수탈자들을 공격하게 부추켰다. 100여명이 살해당한 이른바 청주변란의 배후에는 경대승이 있었던 것이다.
-개경으로 돌아온 경대승은 정중부정권에 적대감을 품고있던 하급장교들을 규합한다. 친구이자 심복이었던 김자격에게 고위무관들에 대한 공격등등의 하극상을 배후에서 선동하고 지휘하는 임무를 맡긴다. 한편 정균의 총애를 받던 허승,김광립등의 공명심을 부추키면서 그들을 자기 사람으로 만든다. 경대승은 이들과 의기투합하여 정중부를 제거하려는 모의를 꾸민다.
-정균이 수안궁주를 취하려던 일로 명종의 심기가 불편했고, 송유인이 문극겸을 탄핵한 일로 왕실과 조정이 정중부일족에게 등을 돌릴 조짐이 보이게 되자 경대승은 거사를 앞당긴다. 수안궁주의 눈물이 아직 혈기왕성한 청년 경대승의 가슴에 불길을 당긴 것이다.
-그날밤 경대승은 김자격을 비롯한 결사대 30명을 이끌고 황궁담장을 넘어들어가 친위대를 참살하고 황궁을 장악한다. 같은 시각, 허승과 김광립이 정균을 살해했다. 경대승은 명종을 안심시키는 한편 정중부와 송유인을 주살할 것을 청한다. 황궁의 변란소식에 피신했던 정중부와 송유인이 주살되고 그들의 ***된 머리가 거리에 내걸렸다.
-조정신료들은 경대승을 청해 축하연을 베풀었다. 경대승은 “선왕을 시해한 대적(이의민)이 버젓이 살아있거늘 경들은 축하연 따위나 벌이겠단 말인가?!” 질타를 하며 상을 뒤엎고 나가버린다. 왕실과 조정은 이 서슬푸른 26세의 청년의 눈치를 살필 수밖에 없었다.
-명종은 불안했다. 축하연자리에서 경대승이 한 말은 곧 무신정변으로 보위에 오른 자신에 대한 부정이었다. 명종은 정중부를 제거했던 허승과 김광립을 은밀히 불러들여 자신의 안위를 당부하고 충성을 다짐받는다.
-허승과 김광립은 정중부를 제거한 공을 내세워 방약무인하였다.거기다가 명종의 총애를 믿고 더욱 설쳐댔다.게다가 그들은 이의민과 은밀히 내통을 하고 있었다. 경대승은 허승과 김광립을 집으로 불러 살해한다. 어차피 경대승에게 그들은 토사구팽할 자들이었다.
-허승등이 제거되자 명종의 불안감은 더욱 커져갔고 경대승을 견제하기 위해 무신정변의 주역들중 유일하게 남은 이의민을 개경으로 불러들인다.
-이의민이 개경으로 돌아왔을 때 긴장감이 감돌았다. 경대승과 이의민 둘중 한사람은 죽을것이 자명했기 때문이었다. 경대승은 이의민을 제거할 치밀한 계획을 짠다. 그러나 경대승이 손을 쓰기 직전 두경승이 경대승을 찾아와 만류한다. 두경승은 반란진압의 동료였던 이의민이나 아끼던 경대승 둘 중 누구도 피를 흘리는 것을 원치 않았다.
경대승은 두경승에게 이의민을 살려주겠다고 약조한다. 그러나 경대승은 차후 행보의 명분을 위해서 반드시 이의민을 제거해야만 했다. 그것은 정치적인 문제였다. 경대승은 두경승이 돌아간 뒤 약조를 깨고 검을 차고 이의민을 치러 나간다. 이의민의 거처를 들이쳤을 때 이미 두경승을 통해 경대승의 계획을 알고 있었던 이의민은 개경을 빠져나가 임진강을 건너고 있었다.
-경대승이 이의민제거에 실패하였지만 그는 개경정권의 일인자였다. 그러나 그는 죽을때까지 관직에 나가지 않았다. 국가의 중대사안이 있으면 입궁하여 명종에게 자신의 견해를 고하는 것이 전부였다. 그러면 모든 일은 그의 뜻대로 이루어졌다.
-그는 용력과 무예가 출중한 일당백의 장사 100명을 뽑아 자신의 사저에 두고 심복 김자격에게 통솔을 맡겼다. 소위 경대승의 도방(都房)정치가 시작된 것이다.
-도방은 경대승의 호위사병이자 탐학으로 사리사욕을 채운자들을 약탈하여 구휼하고 권력을 믿고 전횡을 부리던 자들을 감찰하고 심지어 그들의 살생부를 만들어 응징하는 소위 활빈당의 성격을 띈 집단이었다. 아이러니컬하게도 경대승은 약탈과 응징과정에서 붙잡힌 도방장사들을 사면하도록 조치했던 최고권력자였다. 민중들은 경대승을 칭송하였고 문무신료들은 두려움에 떨었다. 도방의 장사들은 자신들과 함께 거친밥을 먹고 한이불에서 자는 경대승을 추앙했고 그를 위해 언제든 목숨을 내버릴 각오가 되어있었다.
-경대승은 수안궁주에 대해 품었던 정을 끊어낸다. 마음속으로 명종의 정통성을 부인하고 있는 처지에 사적인 감정에 치우쳐 왕의 사위가 될 수는 없었던 것이다. 얼마후 경대승은 각혈을 한다. 정치경륜이 짧았던 그가 노회한 정객들이 득실대는 조정을 주도해야 했고, 정적들이 언제 암살자를 보내올지 모르는 상황에서 한시도 긴장감을 늦출수없었고 게다가 도방정치의 격무속에서 수안궁주와의 이별은 그의 무쇠같았던 몸을 병들게 했던 것이다. 경대승은 김자격에게 도방을 맡기고 일선에서 한발 물러서서 병을 다스릴 수밖에 없었다.
-김자격은 경대승에게 뼈있는 질문을 던진다. “주군께선 어찌 보위에 오르지 않사옵니까?” 두경승이 군대를 장악하고 있고 경주에 이의민이 도사리고 있다 할지라도 지금 경대승의 힘이라면 명종을 시해하고 보위에 오르는 것이 어려운 일만은 아니었다. 그러나 경대승은 민중의 지지를 받지 못하는 권력이 얼마나 쉽게 무너지는가를 너무도 잘 알고 있었다. 그는 이의방이나 정중부의 전철을 밟을수는 없었다. 경대승은 “아직은 때가 아니다”라는 말로 김자격을 물리지만 오랜친구이자 심복인 김자격의 눈빛이 예전과는 달라졌음을 느낀다.
-김자격이 도방을 지휘하면서 도방은 조금씩 변질되기 시작한다. 약탈한 재물이 구휼이 아닌 도방의 자금으로 축재되고, 개인적인 원한으로 양민에게 폭행이 가해졌다. 또한 경대승을 따르는 장사들과 김자격을 따르는 장사들이 사사건건 부딪치며 갈등을 일으켰다.도방장사들의 철통같은 규율과 자부심이 서서히 무너지고 있었다.
-김자격은 경대승이 음복할 탕약에 독을 탄다. 경대승은 탕약을 마시고 쓰러진다. 치독(治毒)을 하여 간신히 목숨은 건졌으나 그의 쇠약한 몸은 이미 죽음을 예고하고 있었다. 도방장사들이 주군을 배신한 김자격을 잡아와 처단할 것을 청하였으나 경대승은 김자격을 용서하고 풀어준다. 사경을 헤매던 경대승은 도방장사들을 불러 자신이 죽으면 도방을 해산하라는 유언를 남긴다. 도방이 권력찬탈의 도구가 되는 것을 우려했던것이다. 얼마뒤 그는 정중부와 이의방의 환영을 보며 눈을 감는다.이때 그의 나이 30세였다.
-『高麗史』에 “경대승의 장례식때 길가에 모인 사람들중 통곡 아니하는 사람이 없었다” 기록되어 있듯이 민중들은 그의 죽음을 애통해하였지만 명종과 조정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경대승의 장사(葬事)가 끝난후 도방장사들은 경대승의 유지를 받들어 해산을 결의하는 자리를 가졌다. 김자격은 이를 반란음모라고 고변하였다.
-명종은 도방명단에 오른 장사들을 모조리 체포하여 가혹한 고문을
가하고 모두 유배 보냈는데 이 과정에서 살아남은 자는 불과 4,5명뿐이었다. 이것은 당시 명종이 경대승과 도방을 얼마나 두려워했는지를 보여주는 단적인 예였다.
출처 : http://kr.blog.yahoo.com/angolpo/25831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