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7. 12. 21. 21:47

[고려] 공예태후 (하)




장흥의 성씨(22)/장흥임씨(12)-공예태후(하)
국모로써 태후, 고려사에 길조 4회 기록하다

장흥타임스 기자 webmaster@jhtimes.net


일국의 국모, 특히 훗날 칭송받는 국모가 될 사람은 태생부터가 그러했지만, 태어나면서 그리고 자라면서 여느 사람과 다른 신비로운 징조가 나타나는 것인지도 모른다. 〈고려사 열전〉에는 태후 외조부의 태몽 외에도 국모와 관련된 꿈 이야기가 3번이나 더 나온다. 태후가 김인규(金仁揆) 아들 지효(之孝)와의 파혼 이후, 점장이로부터 들은, 장차 국모가 될 것이라는 병점과 임원후가 개성부사로 강등되었을 때 판관의 대들보와 황룡의 꿈, 인종이 들깨 5되와 황규 3되를 얻은 꿈 등이 그것이다.

물론 혹자는 이러한 연이은 꿈 이야기에서 훗날 꾸며진 듯한 작위의 냄새가 난다고 생각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어떤 경우이든 임원후의 딸이 왕후가 된 것은 이처럼 결코 인위적인 작용이 아니며, 신비스러운 하늘의 의지나 뜻임을 보여주고 있다는 점에서 시사하는 바가 크다 할 것이다. 왕후마다 이러한 상서로운 꿈 이야기들이 따라다니는 것이 아님은 〈고려사 열전〉을 다 뒤집어 봐도 금방 알 수가 있기 때문이다. 물론 가정이지만, 훗날 꿈 이야기를 조작했다고 치자. 그렇다면 왜 굳이 공예태후에게만 이러한 길조(吉兆)가 있었음을 누누히 강조하려고 애썼던 것일까.

길조 등은 태후의 숙덕·인품,
당대 민신을 반영

우리는 여기서 당대의 정치현실을 먼저 되짚어 볼 필요가 있을 것 같다. 제 16대 예종(1079∼1122. 재위 1105.10∼1122.4)의 뒤를 이어 맏아들 해(楷)가 외조부인 권신 이자겸에 옹립되어 왕위에 오르니, 그가 곧 인종이다. 이자겸은 그의 둘째 딸이 예종의 비가 되자 익성공신(翼聖功臣)에 녹훈되고, 소성군 개국백(邵城郡開國伯)에 봉해졌던 권신이었다. 22년 예종이 죽자 왕위를 탐내던 왕제들을 물리치고 그는 연소한 태자(太子:후에 仁宗)를 즉위하게 만들어 양절익명공신 중서령서경유수(中書令西京留守)가 되고 부(府)를 설치하여 요속(僚屬)을 두게 되었지만, 그의 권력욕은 거기서 끝나지 않고 인종에게 강요하여 셋째와 넷째 딸을 비 (妃)로 삼게 하고 권세와 총애를 독차지하여 자기 생일을 인수절(仁壽節)이라 하고, 매관매직과 수뢰로 축재하다가 26년(인종 4)에는 군국지사(軍國知事)의 직위를 탐내어 왕의 노여움을 샀고, 그를 반대하는거사를 일으킨 상장군 최탁(崔卓)·오탁(吳卓), 대장군 권수(權秀) 등을 모두 살해한 후부터는 국사(國事)를 한 손에 쥐고 세도를 부리고, 그것도 부족하여 이듬해 반역을 도모하여 왕비(王妃)를 시켜 수차 왕을 독살하려 하다 실패하여 척준경(拓 螂? 등에 의해 영광(靈光)에 유배된 후 거기서 죽였던 인물이었다.

그것뿐만이 아니다. 이자겸의 선대로 올라가면, 이자겸의 집안은 대대로 왕실과의 중혼으로 한 겹겹의 세도외척이었다. 즉 그의 증조가 되는 이자연(李子淵)의 세 딸이 제 11대 문종(1019∼1083,재위 1046∼1083)의 비였으며, 자겸의 부친 호(顥)의 딸(자겸의 누이)은 제 12대 순종(1047∼1083,재위 1083.7∼1083.10. 재위 3개월)의 비였으며, 자겸의 차녀는 예종의 비였고, 예종의 비가 낳은 아들이 인종이니, 자겸은 인종에게는 외조부가 되었는데도, 자겸의 욕심은 끝간 데를 몰라 셋째·넷째 딸까지 인종의 비로 들였던 것이다. 딸을 둘이나 외손부로 삼은 것이다. 당시 인종은 14세의 어린 소년, 그러니 인종은 완전히 꼭두각시였고, 이자겸이 국정을 전횡하고 있었는데도 그는 그것도 부족하여 외손자이자 겹사위인 인종을 왕좌에서 끌어내리고 자신이 왕위에 오르려는 왕위찬탈을 기도하게 되었던 것이다.

후덕한 요조숙녀였던 태후,
天福 타고 나

이자겸의 왕위 찬탈 난은 왕건이 고려를 건국한 이래 200년동안 유지된 사직이 하마터면 다른 성씨에게 빼앗길뻔한 일대 위기였다. 그러므로 이자겸 난의 실패와 그의 따른 그의 가문의 몰락은 당시에서는 천벌이나 다름없었고 민심의 승리이기도 했다. 따라서 자겸의 딸들이 하루아침에 반역의 딸이 되어 폐출당하고, 대신 장흥임씨인 태후가 간택된 데 대해 민심이 크게 환영하고도 남았을 것임에는 불문가지다.

또 인종의 왕비로 간택된 태후의 임씨집안은 재상집안으로서는 후덕하고, 왕후 자신이 숙덕으로 칭송되었을 만큼 높은 교양을 지니고 행실이 아름다운 문자그대로 요조숙녀였다. 태후 임씨의 행실과 인품이 어찌했는지는 태후가 아들을 낳았을 때, 왕비 책봉 때에 2회에 걸쳐 내린 인종의 조서(詔書)와 뒷날 태후의 죽음을 당해 명종이 보인 효행의 태도나 금주(金主)의 조문을 보면 확연히 들여난다. 게다가 그가 낳은 소생 중에서 세명이나 왕이 된 복도 많고 특이한 왕후였던 것이다.

그곳뿐만이 아니다. 폐출당한 이자겸의 3·4녀 폐비 이씨들에게는 소생이 하나도 없었다. 또한 인종은 공예태후 외에도 병부상서 김선의 딸을 차비(次妃)로 간택해, 입궁시켰는데, 그녀에게도 소생이 없었다. 인종이 4명의 비를 맞아들였는데도 공예태후 단 한사람에게만 5남4녀가 있었다는 사실도 어찌보면 태후의 복이라면 복이요, 그 복에는 천복이 함께할 수 있었다고 할 수 있는 것이다. 만일, 후에 사가들이 작위로 태후에 대한 태몽 등의 꿈 이야기를 꾸몄다고 한다면, 태후가 바로 그처럼 천복을 받고 태어난 왕비요 왕후였기에 하늘이 마치 왕비로 예정했다는 식으로 그러한 꿈이야기나 길조등을 각색했다고도 할 수 있을 것이다.

태후의 예지와 두 아들의 비운

태후는 구중심처의 여인이었지만, 예지의 면에서도 인종보다 못지않았던 듯싶다. 그녀는 숙덕했을뿐더러 총명하고 사려깊고 과단성도 있었듯 싶다. 인종이 장남을 일단 태자로 책립하였으나, 태후는 자신의 같은 아들인데도 왕의 자질에서는 장자가 차자보다 못하다고 여겨 왕에게 태자를 폐하고 둘째인 대령후로 대신하자고 늘 주장하였다.

그러나 우유부단한 왕이 들어주지 않았다. 〈고려사 열전〉에서 전하는, 태후의 하늘을 향한 기도와 갑자기 내린 소나기, 궁중기둥에 벼락이 내리고 왕이 태후의 옷자락 아래로 엎디어 들어간, 하늘이 왕을 경계한 듯한 믿기 어려운 이적의 일화는 바로 이러한 사실을 잘 반증하고 있다.

1146년 2월 장묘일에 인종이 죽자, 그의 유언에 따라 태후의 장자인 현(睍)이 왕위에 오르는데, 그가 제 18대왕 의종이었으며, 그의 나이 20세였다.

의종조의 실록을 보면, 태후가 그를 왕의 자질에 의심을 품었음직한 내용들이 많이 나온다. 의종은 한 마디로 환락주의자였고, 의종조에 이른바 '환관정치'라는 기형적인 정치형태가 이루어질만큼 무력한 정치를 펴, 끝내는 정중부의 난을 야기, 정중부에 의해 왕위자리를 아우였던 익양공 호(顥)에세 물려주면서 이때부터 1백년간의 무신정권 시대를 열게하는 계기를 만들었던 왕이었다.

왜 태후가 장자이고, 이미 태자로 책립된 맏아들을 불신하고, 대령후 경(大寧候暻)을 태자로 옹립해 줄 것을 주장했는지 짐작하고도 남게한다.

태후가 장자보다 차자를 더 사랑했음은 분명한 듯하다. 그래서 의종은 그런 모후를 별로 좋아 하지 않았고, 왕위에 오른 후에는 대령후 경을 몹시 경계하게 된다. 대령후 경은 끝내 역모로 몰려 유배길에 오르게 되고, 유배지에서 불운한 생을 마감하게 된다. 史實에서는 대령후 왕경의 자질이나 능력 등은 전혀 언급되고 있지 않고 있다.

그러나 현명한 태후가 편애할 정도였으니, 분명히 장자인 의종보다는 나았을 것임에는 분명하다. 그러나 역사는 언제나 승자의 편에 선 기록이어서, 그는 역모자로 줄곧 귀양살이를 하다 사망연대도 기록되지 않는 채 불운한 생을 마치는 것이다. 역사에서 가정법의 도입은 무모한 짓이기는 하지만, 만일 왕경이 왕위에 올랐다면, 어떠하였을까. 최소한 의종조의 무능한 정치형태는 보이지 않았을 지도 모른다고 생각할 수는 있지만, 아무튼 태후에게는 지아비인 인종의 죽음에 이어 자신이 지극히 사랑했던 왕경의 유배는 큰 비극이 되었을 것이다.

비운 속의 末年,
국모 체통 잃지는 않아

그러나 그러한 비극 속에서도 태후는 의종과의 극한 대립은 없이 잘 견뎠던 같다. 대신, 자식 잃은 일은 두고두고 가슴 깊이 한이 되고도 남았을 것이다. 명종 12년(1182년)에 넷째왕자인 원경국사 충희가 죽자, 명종은 태후가 놀라고 비통해할까 봐 그의 죽음을 알리지 않았으며, 몇 달 후에야 이 소식을 전해들은 태후는 여러 장군들이나, 명종이 무신들과 결탁하여 충희를 죽인 것으로 알고 분이 치밀어 기어코 병을 얻고 만다. 이것 역시 무신 득세 시대였던 당시 구중심처에 있던 태후 처지의 일단을 이해할 수 있게 하는 부분이다.

또한 때마침 다섯째 왕자 평량공(후에 신종)이 치질로 오랫동안 태후에게 문안을 못했는데, 태후는 그도 충희와 같은 화를 당한 줄로 알고 병세가 더 악화되어 세상을 하직하게 된다. 이것이 태후 이전에 한 인간이고, 5남 4년를 둔 어머니였던 장흥임씨의 말년이었다.
그러나, 무신집권의 혼란기에서도 국모로서 품위를 그녀는 결코 잃지 않았다. 한이 많아 분에 못이겨 병을 얻었을 망정, 투기하거나 사심을 품지는 않았다. 비운의 말년이었지만, 그녀는 명종이 그토록 비통해 할 정도로 자녀들에 대한 한결같은 사랑을 보인 자애로운 어머니로서 한 생을 마감했다. 그녀의 죽음을 맞아 금나라가 조문사절에 보낸 조문의 일절은 그러한 태후의 삶은 단적으로 잘 설명해 주고 있다.

“…생각하건대 영가(靈駕:돌아가신 분)는 일찌기 명문의 딸로서 왕실로 시집와서 초년에는 부녀의 도리로서 남편을 내조하였으며, 만년에는 자애로운 어머니로서 그 자손들을 보살피더니 갑자기 세상을 떠나니, 참으로 애석하고 안타깝습니다.…”
<장흥신문 199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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