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1. 3. 27. 19:21

대통령이 긁적인 ‘비공식메모’까지 홍보하는 나라 - 양정철닷컴




출처 : http://yangjungchul.com/133
 
대통령이 긁적인 ‘비공식메모’까지 홍보하는 나라
2011/03/27 07:13
 

이명박 대통령의 비공개 메모. 이러다가 약봉지나 손수건까지 홍보도구로 삼는건 아닌지...

 

이명박 대통령이 천안함 희생 장병을 생각하며 쓴 메모가 25일 공개됐습니다. 이 대통령은 천안함 피격 1주기를 하루 앞둔 25일 청와대에서 선임 행정관급 이상 100여명과 함께 확대비서관회의를 하는 도중 이 메모를 썼다는 게 청와대 설명입니다.


메모에는 “여러분은 칠흑 같은 한 밤에 나라(대한민국)를 지키다 순국했습니다. 여러분은 분단된 조국에 태어난 죄밖에 없습니다. 잘못이 있다면 여러분을 지키지 못한 우리에게(나에게) 있습니다. 언젠가 하늘나라에서 만나면 여러분을 지켜주지 못한 것에 대해 용서를 빌고 싶습니다”라고 적혀 있습니다.


청와대는 이 대통령이 이를 실제로 낭독하지는 않았지만 국가 지도자의 번뇌가 담겨 있었다면서 메모를 사진까지 찍어서 공개했습니다.


대통령 홍보를 위해 그렇게까지 해야 하나 싶어 측은한 마음이 듭니다.


청와대에는 대통령 전용 메모지가 있습니다. 가로 12×세로 20cm 정도 크기의 백지로, 메모지 상단엔 대통령 상징인 봉황무늬가 금색으로 , 하단엔 대통령 이름이 인쇄돼 있습니다. 한 장씩 뜯어서 사용할 수 있는 고급 제본 형태입니다.


메모지는 대통령 동선을 따라 어디든 비치해 둡니다. 본관 집무실은 물론, 접견실, 회의실, 관저 어디든 미리 마련해 둡니다. 대통령이 회의를 하는 제3의 장소에도 미리 갖다 놓습니다.


회의자료나 말씀자료는 항상 별도로 준비를 하기 때문에, 이 메모지는 대통령이 즉석에서 지시할 사항이나 스쳐가는 단상, 얼핏 떠오르는 구상을 편하게 적는 용도로 사용됩니다. 철저히 비공개 메모인 셈입니다. 비공개 메모이기 때문에 과거 청와대에선 이를 폐기하거나 중요한 것만 빼서 대통령 개인이 퇴임 후 보관했습니다.


이조차 장차 대통령 국가기록이라고 판단해 잘 보관을 해서 대통령기록관으로 넘기기 시작한 건 참여정부 때부터입니다.


이 메모는 비공개 기록이기 때문에 회의가 끝나는 대로 부속실 수행비서가 챙겨 대통령에게 갖다 드리거나, 더 이상 대통령에게 필요가 없을 경우 국가기록으로 보존하기 위해 기록관리 담당 비서관에게 이관합니다. 따라서 이 메모에 손 댈 권한은 부속실과 기록관리 담당 부서 밖에 없습니다.


이 메모의 성격에 대해 상세하게 설명을 드리는 이유가 있습니다. 이런 기록물은 비공개영역, 심지어는 사적인 영역, 아니면 공개하는 게 바람직하지 않은 영역에 해당된다는 것입니다.


대통령은 하루에 수많은 행위를 하고, 그 행위는 모두 기록으로 남습니다. 그 가운데 지극히 작은 비공식 메모, 그것도 쓰다 지우다를 반복한 끄적거린 글을 대단한 고뇌의 산물이라도 되는 양 홍보소재로 내세우는 것은 적절치 않습니다.


몇 년이 지나고 퇴임 후 한참 시간이 흐른 다음에, 이런 기록이 있었다며 공개되는 건 모르겠습니다. 기다렸다는 듯 회의가 끝나자마자 온라인대변인이 번개처럼 기자들에게 메모내용을 불러주고 사진을 찍어 홍보를 한 대목에선 작위적 설정의 느낌마저 줍니다. 그렇게 홍보가 하고 싶으면 단순히 메모내용만 가볍게 말로 전달하면 될 것을.


“대통령께서는 화장실이 급한데도 꾹 참고, 정해진 회의시간을 넘겨가며 중요한 지시를 내리셨다. 대통령은 만사를 제쳐두고 이 일을 걱정할 만큼 국가지도자로서의 번뇌가 깊다”라는 식의 경박한 홍보기법과 다르지 않습니다.


“대통령은 가벼운 감기증상이 있어 주치의로부터 식후 30분 이내에 약을 복용하라는 권고를 받은 상태였는데도, 약 복용시간조차 잊어버리고 오찬회의를 두 시간 가까이 주재하셨다. 몸을 아끼지 않는 국가지도자의 고뇌와 치열함을 엿볼 수 있는 대목이다”라는 식의 유치한 홍보 테크닉과 다르지 않습니다.


마치 독재자가 다녀간 곳마다 간판이나 기념비를 세워 인민들에게 지도자의 위대함을 길이길이 남기는 어느 나라 모습을 보는 듯싶어 씁쓸합니다.


이런 메모 하나를 두고 요란을 떠는 행태를 보며 ‘국격’이란 단어를 떠올리는 것은 비단 저뿐일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