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처 : http://www.viewsnnews.com/article/view.jsp?seq=72453
'1997년 종금사태'의 악몽을 아시나요?
<분석> 왜 여야는 '저축은행 사태' 보고 종금사태를 말하나
2011-02-22 14:35:52
"시장 일각에서는 벌써부터 최근의 저축은행 사태가 1997년 외환위기를 초래한 ‘종금사 연쇄 부도’사태를 연상시킨다는 지적을 하고 있다."(전현희 민주당 의원)
"IMF 위기 당시에도 정부는 지금처럼 부실화된 종금사 몇 개만 처리하면 될 것처럼 말했다. 그러나 이후에 기업이나 은행들이 연쇄도산을 하면서 문제가 생겼다."(이진복 한나라당 의원)
여야에서 잇따라 저축은행 사태를 1997년 IMF사태를 촉발시킨 기폭제가 됐던 '종금 사태'와 비교하는 발언들이 흘러나오고 있다. "별것 아니다"라는 정부 주장과는 달리, 뱅크런 사태가 멈추지 않고 있는 저축은행 사태가 심각하게 받아들이고 있다는 얘기다.
실제로 부산지역에서 최악의 뱅크런 사태가 발생한 21일 전국 저축은행에서 빠져나간 돈은 4천900억원에 달한다. 문제는 난장판이 벌어졌던 부산에서 빠져나간 돈은 900억원에 불과하다는 것. 나머지 4천억원이 부산이 아닌 전국에서 소리소문없이 빠져나갔다. 저축은행에 5천만원 이상을 맡겼던 큰손들이 조용히 몫돈을 빼내기 시작했다는 의미다.
그렇다면 여야 의원들이 우려하는 '1997년 종금사태'란 도대체 무엇인가. 종금사는 지금 우리나라에 하나도 없다. IMF사태 발발후 30개가 깡그리 사라졌기 때문이다.
종금사는 종합금융회사의 줄임말이다. 종금사가 최초로 출현한 것은 박정희정권 시절이던 1976년으로, 한국, 한외, 한불, 아세아, 새한, 현대종금 등 6개가 허용됐다. 종합금융이란 말 그대로 예금·보험을 제외한 나머지 모든 금융업무를 할 수 있는 '금융 종합상사'로, 1차 오일쇼크로 심각한 외환위기를 겪었던 박정희 정권이 외자조달을 위해 허용했다. 이들 6대 종금은 '황금알을 낳는 거위'로, 재계의 부러움의 상징이었다.
재계는 전두환·노태우 정권시절에 자신들도 종금을 하게 해 달라고 물밑로비를 폈으나, 이들 정권은 재벌의 무한팽창을 경계했던 까닭에 꿈을 이룰 수 없었다. 그러던 것이 1993년 김영삼 정권이 출범하면서 상황이 급변했다. YS정권은 집권 첫해에 9개의 투자금융사(단자사)에 대해 종금사로의 전환을 허용했고, 1996년에는 15개의 종금사 전환을 추가로 허용해 주면서 종금사는 30개로 급증했다. 로비가 먹힌 것이다.
당시 학계와 금융계에선 많은 우려가 제기됐다. 투기성이 강하고 국제 금융노하우가 없는 투금사들을 대거 종금사로 전환시켜 국내외 영업을 허용할 경우 장차 중차대한 금융위기가 도래할 것이란 경고였다. 하지만 YS정권은 이를 묵살했고, 재무부 출신 다수가 신설 종금사 책임자로 부임해갔다.
아니나 다를까, 단기차익에 눈먼 종금들은 무지막지한 '러시안룰렛' 게임을 벌이기 시작했다. 일본에서 저리의 1년 단기자금을 빌려, 금리는 높으나 그만큼 떼일 위험성이 큰 태국·러시아 등의 신흥국가 장기채권 등을 겁 없이 사들였다. 이들은 당시 러시아 정부 장기채권을 15%나 싹쓸이하고, 태국 부동산업계에 40억달러를 빌려주기도 했다.
국내에서도 마찬가지였다. 1996년부터 불황이 시작되면서 심각한 자금난에 봉착한 한계기업들은 담보가 없이도 돈을 빌릴 수 있는 종금사 앞에 줄을 섰고, 이들은 은행에서 돈을 빌려 고금리 기업어음(CP)을 겁없이 사들였다.
이 과정에 재경원(현 기획재정부의 전신)은 철저히 종금사 편이었다. 재경원은 종금사의 막가파식 영업을 규제하기는커녕 도리어 은행들이 CP업무를 하지 못하도록 창구지도를 하는 등 종금사를 감쌌다. 30개의 종금사를 감시해야 할 인력도 자금시장과의 사무관과 주사, 단 두명이었다.
그러다가 1997년 들어 태국을 시작으로 아시아 금융위기가 시작되면서 종금은 무너져내렸다. 해외에 꿔준 돈은 받을 수 없었고 일본 등은 돈을 갚으라고 독촉했다. 국내 한계기업들도 줄줄이 쓰러졌다. 결국 종금사들은 모두 붕괴됐고, 종금사가 촉발시킨 외자유출 사태로 1997년말 한국은 IMF에 구제금융을 신청하는 '국가도산'의 굴욕을 경험해야 했다.
하지만 IMF사태 발발 과정에도 재경원은 끝까지 종금사를 감쌌다. 1997년말 IMF에 구제금융을 신청하기에 앞서 IMF가 강도높은 종금사 정리를 요구하자, 그해 11월22일 재경원은 30개 종금사 가운데 12개사에 대해 외환업무 중지를 명령했다. 그러나 IMF실사단이 그해 말 실사후 우선적으로 문을 닫도록 통고한 종금 9개사의 명단은 재경원 명단과 일치하지 않았다. 재경원이 끝까지 자신들과 밀착한 종금사들을 감쌌다는 얘기다.
당시 '한국 경제식민지 총사령관'이었던 미셸 캉드쉬 IMF총재는 공개적으로 "한국 관료와 종금사는 근친상간 관계에 있다"고 질타하기도 했다. 오만하던 재무관료들은 아무 소리도 못했다.
그후 나머지 종금사들도 모조리 셔터를 내려야 했다. 국가를 부도로 몰아넣은 종금사는 더이상 시장에서 영업을 할 수 없는 국민의 '공공의 적'이었기 때문이다. 끝까지 종금 문을 닫지 않으려 한 대기업들도 시장에서 혼쭐이 났다. 그런 대표적 예가 LG그룹이었다. "LG라는 간판이 붙은 계열사의 문을 닫을 수 없다"는 오너의 고집으로 끝까지 LG종금의 셔터를 내리지 않으려 했던 LG그룹은 그룹 자체가 쓰러질 뻔했다. 당시 LG그룹 금융담당 최고위 임원은 "LG종금을 살리려다가 한때 거의 4조원이 빠져나갔다"며 "금융이 얼마나 무서운 것인가를 그때 뼈저리게 체험했다"고 토로했다. 결국 LG종금도 퇴출됐다.
1997년 '종금 사태'와 지금의 '저축은행 사태'는 분명 다르다. 저축은행에는 국가도산의 기폭제가 된 외환거래 문제가 포함돼 있지 않다. 그러나 국내 부문에서는 유사한 점이 많다. 막대한 PF(프로젝트파이낸싱) 대출이 그것이다. PF 대출은 시한폭탄이다. 올 들어 중견 건설사들이 줄줄이 쓰러지고 있다. 'MB 사돈가'인 효성그룹의 진흥기업도 사실상 쓰러졌다. 그러나 솔로몬 저축은행은 진흥기업 어음을 스스로 회수해야 했다. 시한폭탄의 파괴력만 더 키우고 있는 셈이다. 물가 폭등으로 필연적인 금리 인상이 현실로 나타나기 시작하면 저축은행 사태는 더욱 눈앞 현실로 나타날 것이다.
'종금사태'와 더 큰 유사점은 '정부의 신뢰 상실'이다. 종금사태때도 정부는 끝까지 종금을 '내 새끼'처럼 감싸고 돌았다. 지금도 마찬가지다. 그러다가 시장의 신뢰를 잃고 국민의 신뢰를 잃으면서 정부는 '양치기 소년'이 됐다. 지금도 저축은행이 쓰러진 부산, 강원, 목포 등에서는 "정부 말을 못 믿겠다"고 아우성이다.
'무신불립(無信不立)'. 정권이 저축은행 사태를 진정시키기 위해 무엇보다 먼저 되새겨야 할 금언이다.
박태견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