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1. 2. 6. 16:53

[임진왜란] 이순신과 원균 바로보기(22)-장문포 해전




이순신과 원균 바로보기(22)-장문포 해전


 2차 당항포 해전 이후 큰 전투 없이 소강기가 지속되었다. 웅천해전과 2차 당항포 해전의 경험을 통해 수군은 출전해도 적군이 육지에 숨어 나오지 않는 이상 별 전과는 거두기 힘들다는 것은 충분히 알 수 있었다. 그리고 전쟁 자체도 소강기에 접어들었기 때문에 별다른 전투가 이어지지 않는 것도 당연했다.

그러나 그것은 현장에 있던 이순신의 생각이었지, 월산대군의 저택이었던 정릉동 행궁에 앉은 선조의 생각은 그렇지 않았던 모양이다. 1594년 8월 21일에는 영의정 유성룡과 대화를 하면서 이순신이 일을 게으르게 하는 건 아니냐는 말을 한다. 유성룡은 이순신을 변호하지만 선조의 생각은 변하지 않은 모양이다. 9월 3일에는 이순신에게 선조의 밀지가 도착하는데, “수륙 여러 장수들이 팔짱만 끼고 서로 바라보면서 한 가지라도 계책을 세워 적을 치는 일이 없다.”라는 내용이었다. 이 날의 <난중일기>를 보면 다음과 같이 답답한 심정을 토로하고 있다.
9월 초3일[무인] 비가 조금 왔다. 새벽에 밀지가 들어왔는데 「수륙 여러 장수들이 팔짱만 끼고 서로 바라보면서 한 가지라도 계책을 세워 적을 치는 일이 없다」했지만, 3년 동안 해상에 있어 그럴 리가 만무하다. 여러 장수들과 함께 맹세하고 죽음으로써 원수 갚을 뜻으로 날을 보내지만 험고한 곳에 웅거하여 소굴 속에 들어 있는 적이라 경솔히 나가 칠 수는 없는 일이요, 또 더구나 「나를 알고 적을 알아야만 백 번 싸워도 위태함이 없다」하지 않았는가. 종일 큰바람이 불었다. 초저녁에 불 밝히고 혼자 앉아 스스로 생각하니 국사가 어지럽건만 안으로 건질 길이 없으니 이 일을 어찌할꼬. 밤 10시께 흥양이 내가 홀로 앉아 있는 줄을 알고 들어와 자정까지 얘기하다 헤어졌다. 답답하지만 왕의 밀지에 반박할 수도 없는 노릇이다.

그런 가운데 1594년의 마지막 수군 출동인 장문포 해전이 추진된다. 장문포 해전은 이전의 해전과는 몇 가지 차이점을 보이고 있었다. 이전의 해전들은 이순신의 현장에서의 판단이 위주가 되어 순전히 수군의 완전 주도형 해전이었지만, 장문포 해전은 이와는 달리 통제사 이순신이 아니라 원균의 인척이며 좌의정 겸 삼도체찰사인 윤두수가 중심이 되어 추진된 해전이다. 장문포 해전의 건의자도 처음부터 이순신이 아니라 윤두수와 원균이었다.

이에 대한 이순신의 생각은 부정적이었다. 윤두수가 도착한다는 내용의 편지를 받은 날의 일기에는 “심히 불행한 일이다.”라고 말하고 있는데, 이는 윤두수의 의해 무리한 작전이 추진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표출된 것이다. 9월 19일에는 비변사가 거제도 공략을 주장하는 등 장문포 해전은 본격 추진되어 간다.

이렇게 작전이 결정되면서 9월 22일에는 이순신에게도 27일에 곡 출동하라는 도원수 권율의 밀서가 도착한다. 26일에는 곽재우, 김덕령 등이 도착하는데 이들이 수군과 합세하기 위하여 온 것을 사람을 보내서 확인했을 정도로 이순신은 이 작전의 주도권을 지고 있지 않았다. 김덕룡도 <난중잡록>에서는 곽재우에게 “나도 역시 이번 일의 자초지종을 알지 못하오. 굴에 들어 있는 적을 어찌 치겠소?”라고 말했다고 기록되어 있다. 의병장들도 이 작전에 대해서는 제대로 파악하지 못한 모양이다.

27일에는 비변사에서 윤두수가 올린 장계를 두고 비변사는 이 작전을 다시 논의한다. 비변사는 이전에 작전에 찬성한 것은 ‘주사(舟師)로 하여금 거제(巨濟) 해중의 적을 공격하여 적들로 하여금 오로지 바다를 막는 데에 마음을 쓰게 한 뒤에 육지의 병사는 갑자기 적의 진영에 가까이 가지 말고 산꼭대기와 숲속에다 의병(疑兵)을 많이 설치해서 적으로 하여금 놀라고 당황하여 수미(首尾)가 서로 돌아보지 못하게 한 다음 아군(我軍)의 정예병을 뽑아 좌우에서 치게 하는 것’이라고 말한다. 하지만 윤두사가 올린 장계의 내용은 한 번의 결전으로 전투를 한다는 것이고, 그것도 확실히 이긴다는 게 아니라 ‘이기면 하늘이 도와준 것이고 이기지 못해도 종묘 사직에 오히려 할 말이 있을 것’인 수준이었다. 자신들의 당초 의도와는 다르게 작전이 전개될 기미를 보이자 이를 우려한 비변사에서는 선전관을 급파해 뜻을 전달할 걸 건의하고, 선조도 이를 승인하였다.

그러나 때늦은 조치였다. 비변사가 이 같이 논의한 그 날, 수륙군은 예정대로 출동하였기 때문이다. 9월 27일에 출동한 수군은 29일에 거제도 장문포 앞바다에 이른다. 그러나 한산도 대첩과 안골포해전 이후 항상 그랬듯 일본 수군은 조선 수군에 대한 반격을 자제하고, 험준한 지형에 의지하여 나오지를 않았다. 그나마 나온 적도 선봉 2척을 무찌르니 땅으로 올라가 더 이상의 대응을 하지 않았다. 그리하여 그날은 빈 배만 깨뜨리고 물러나 칠천량에서 밤을 보낸다.

다음날인 10월 1일에도 큰 전투는 없었으나, 일본군이 작은 배를 보내 물에 배를 매려던 조선군 사도 2호선에 불을 던진 일이 있었다. 다행히 불은 꺼졌으나 경계를 소홀히 한 군관은 처벌을 받았다. 이후 10월 3일까지 별다른 전투가 없는 대치상황이 이어졌다.

그러다가 10월 4일에 이르러 조선군은 다시 공격을 실시한다. 곽재우와 김덕령이 군사 수백 명을 이끌고 땅으로 상륙을 하고 바다에서 수군이 호응하는 작전이었다. 곽재우와 김덕령은 이 전투에서 해병대가 된 셈이었다. 개전 이후 처음으로 수군과 육군이 합동으로 작전을 한 것이기도 했다. 이는 일본군을 혼란시키기는 했지만 육군이 기대만큼 활약을 해주지 못하여 적군을 바닷가로 몰아내지도 못 하였고, 따라서 수군도 적을 섬멸하고 싶어도 할 수가 없었다. 결국 이 날의 작전도 별다른 전과도 피해도 없이 종결되었다. 윤두수가 장계에서 말한 결전은 일어날 틈도 없었다. 

6일에는 선봉을 장문포로 보내니, 일본군은 패문을 땅에 꽂아 두고 있었는데 그 내용은 “ 일본이 대명으로 더불어 화친을 의논하는 터이라 싸울 것이 없다.”라는 것이었다. 2차 당항포해전에서 담종인에게 패문을 보내게 요청한 거처럼 자력으로 무찌를 자신이 없는 조선 수군에 대하여 명나라의 권위를 빌려서 전투를 피하고 물러나기를 바랬을 것이다. 이 날 일본군 1명이 투항을 한 것 외에는 별다른 전과를 거두지 못하였다.

일본군은 전투 종반까지 무대응 전술로 일관하여 결국 10월 8일 조선군은 한산도로 귀환하였다. 작전이 별 성과없이 끝나자 대간들은 윤두수를 일제히 탄핵한다. 선조는 윤두수를 좌의정 겸 삼도체찰사에서 해임하는 대신 판중추부사로 임명하고 넘어가려 한다.

하지만 11월, 경상도 관찰사 홍이상이 이 전투에서 사도의 전선이 재차 진행된 공격에 불타고 사후선 3척이 실종됐으나 보고되지 않았다는 내용의 장계를 올린다. 이 내용은 사도1호선에 불을 지르긴 했으나 금방 꺼졌다는 <난중일기>의 내용과는 다른데, 권율, 이순순, 원균, 윤두수 등이 장계에서는 이 사실을 적지 않았다 하더라도, 웅포해전에서 전선이 좌초한 사실은 일기에 적은 이순신이 이때는 적지 않았을까? 아니면 전투에 파견된 홍이상의 군관의 보고에 문제가 있어서 잘못 장계를 올린 것인가? 아직 추가적인 검토가 필요하다.  

홍이상의 장계가 올라오자 사헌부를 비롯한 대간들은 윤두수의 파직을 청하는 건 물론, 권율과 이순신을 작전실패와 보고누락의 책임을 물어 처벌할 것을 요구한다. 선조는 홍이상의 장계내용을 자신이 따로 보고 들은 바와 같다고 말하고 군 기강을 문제 삼았지만, 정작 사헌부의 탄핵은 모두 거절하였다. 이 문제는 얼마 안 가서 무마되지만, 이순신으로서는 점차 견제를 받기 시작한 일이 되었고, 곧이어 라이벌이 되기엔 턱없이 부족한 누구와의 문제가 본격적으로 제기되면서 그의 신변에 조금씩 위기가 다가온다.



출처 : http://history21.egloos.com/223479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