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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번째 짐싸기 전에 취업해야 할텐데… - 미디어오늘

civ2 2011. 4. 14. 11:15

출처 : http://www.mediatoday.co.kr/news/articleView.html?idxno=94811
 

"8번째 짐싸기 전에 취업해야 할텐데…"

캠퍼스족 방찾아 삼천리…고시원·공용화장실에 월세 부담, 그들의 희망은 어디에…

허완 기자 | nina@mediatoday.co.kr    2011.04.12  23:27:05      
 
요즘에는 ‘아프니까 청춘’이라는 말이 유행이지만, 원래 청춘은 ‘봄’과 가장 어울리는 단어다. 겨우내 숨죽였던 새싹이 돋아나고 꽃이 피어나는 봄은 그 자체로 ‘젊음’의 상징이다. 유난히 길었던 겨울이 지나 마침내 봄이 왔지만, 움츠러든 청춘들의 어깨는 펴질 줄을 모른다. 새학기, 새 봄을 맞이하는 설렘과 희망을 대신하는 건, 끝없이 지속되는 ‘불안’이다.

가장 먼저 그들을 덮치는 불안은 ‘거주의 불안’이다. <88만원 세대>를 쓴 우석훈 교수는 한 칼럼에서 “요즘의 청년들은 더 이상 ‘집’을 사고의 대상으로 삼지 않는다”고 말했다. 언제부턴가 고작해야 대여섯 평 넓이의 ‘방’이 곧 그들이 상상하고 숨쉴 수 있는 터전의 전부가 됐다. 새 학기를 맞으면서 여러 이유로 새 ‘방’을 찾아 이사를 해야 했던 다섯 명의 청춘을 만났다. 각자 사는 곳과 형편은 달랐지만, 어쩌면 그들은 같은 이야기를 하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1.
서울 소재의 모 사립대 4학년 1학기에 재학중인 안 모(27) 씨는 자취생이다. 대학 때문에 서울로 올라온게 2004년이다. 그 이후 안씨는 거의 매학기 집을 옮겨다녔다. 올 2월에도 어김없이 그는 짐을 싸날랐다. 같은 집에서 가장 오래 살았던 기간은 1년이다. 딱 한 번 있었던 일이다. 상대적으로 넉넉하지 않은 집안 사정 때문에 그에게는 ‘최대한 싼’ 집을 찾는게 우선이었다. 그러나 집이 싼 데에는 다 이유가 있었다. 몇 개월 살다보니 방이 너무 작거나 화장실에서 악취가 올라오거나 여름에 습기가 차는 등의 문제들이 하나 둘 드러나기 시작했다. 그 때마다 안씨는 이사를 감행했다. 그는 지금 공용화장실과 샤워실이 3층에 붙어있는 1층 방에 산다. 매일 오르내리는 1층과 3층 사이에 놓인 계단이 그에게는 아직 멀기만 하다.

#2.
김병석(24) 씨는 “고향에서라면 베란다가 딸린 집을 빌리기에 충분했을 돈”을 내고 서울시 동작구 흑석동에 자리잡은 원룸에 둥지를 틀었다. 방이 조금 낡긴 했지만 그런대로 햇볕이 잘 들고 이전에 살던 곳보다 넓어서 좋다고 했다. 무엇보다 답답한 반지하방에서 벗어난 것만으로도 그에게는 대단한 ‘진전’이다. 반지하방의 주인은 보증금 200만 원에 매 달 40만원을 받던 계약이 끝나자마자 월세를 45만원으로 올려달라고 말했다. 김 씨는 월세를 더 내는 대신 보증금을 올려 새 방을 구했다. 지금 살고 있는 방에 그럭저럭 만족은 하지만, 앞으로 어떻게 될지는 모른다. 이번 주인도 또 월세를 올려달라고 할까봐 걱정이라는 김 씨의 눈길이 조용히 창 밖에 머물렀다.
 
#3.

신촌의 모 대학교에 다니는 이보형(24) 씨는 송파구 가락동 집에서 통학이 어려워 하숙을 택한 경우다. 길 위에서 맥없이 한 시간이 넘는 시간을 흘려보내는게 아깝기도 했고, 무엇보다 학업에 집중할 수가 없었다. 지금의 하숙집은 올 2월에 친구의 소개로 구했다. 반지하방이라 먼지가 많이 들어오고 소음이 심한 편이다. “덕분에 감기가 일주일째 나아지지 않는다”고 그는 말했다. 이 씨는 입대 전과 제대 후에 틈을 내서 총 1년 동안 아르바이트를 했다. 마트에서 하루에 여덟 시간씩 일을 해서 모아 놓은 돈으로 매 달 39만원씩, 한 학기 하숙비를 충당하고 있다. 입대 전과 비교해 등록금은 50만원이 넘게 올랐다. 꼭 3년 만이다. 한 학기에 430만원을 내야해서 부모님께는 늘 죄송한 마음 뿐이다. 졸업까지 아직 다섯 학기를 남겨둔 그는 이제 모아놓은 돈이 얼마 남지 않아 다음 학기부터는 어쩔 수 없이 통학을 할 것 같다고 멋쩍게 웃었다.

#4.
올 2월에 대학을 막 졸업한 남순영(26) 씨는 ‘창문’과 ‘화장실’이 있는 고시원에 산다. 서울대입구와 신림동에 있는 학원에 다니기 위해 2주 전에 평촌 집에서 나왔다. 남 씨의 방처럼 창문과 화장실이 모두 있는 집은 고시원 중에서도 ‘고급’에 속한다. 아무래도 여학생의 입장에서는 고려할 부분이 많았다. 남 씨는 보증금 없이 매 달 44만원을 낸다. 주방도 같이 써야 하고 방도 비좁지만, 남 씨는 “시험 볼 때 까지만 머물 작정”이라 그럭저럭 큰 불만 없이 산다. “어느 정도 불편을 감수하고 그냥 잠깐 사는 거”라고 남 씨는 말했다. 시험은 8월에 본다. 무더운 여름을 좁은 고시원에서 지내야 하지만, 더 큰 걱정은 따로 있다. 시험에 꼭 합격해 빨리 부모님의 부담을 덜어드렸으면 좋겠다고 말하는 남 씨의 입에서는 옅은 한숨이 새어나왔다.

#5.
마찬가지로 두 달 전에 대학을 졸업하고 취업을 준비하고 있는 손은경(26) 씨는 졸업과 동시에 꼭 일곱 번째 이삿짐을 쌌다. 고향을 떠나 서울에 올라온 건 5년 전이다. 기숙사에서도 잠깐 살았지만, 오래 머물 수는 없었다. 학생 수에 비해 수용 인원이 턱없이 부족하고, 그마저도 신입생에게 절반의 몫이 돌아가다보니 가혹한 ‘성적 경쟁’을 피할 수 없었던 탓이다. ‘4.0(A학점)’을 받아도 짐을 싸야하는 경우가 종종 있었다. “집이 맘에 들면 1년이고 2년이고 계속 살면 좋지만”, 손 씨가 한 집에서 가장 오래 머물렀던 건 1년이 전부다. 우선 날로 오르는 월세가 가장 큰 부담이다. 보증금을 낮춰서라도 월세를 더 받으려는 주인들이 많아졌다고 손 씨는 전했다. 한 번에 보증금을 천만원이나 올려달라는 주인도 있었다. 손 씨는 “여덟 번째 짐을 싸기 전에 빨리 취업을 하는 수밖에 없다”고 웃으며 말했다.

경향신문이 아르바이트 전문 포털 알바천국의 설문조사 결과를 인용해 보도한 내용에 따르면, 전체 대학생들의 한 달 평균 생활비가 42만원에 이르는 것으로 조사됐다. 이 가운데 하숙집이나 기숙사, 원룸 등에 거주하는 학생은 부모와 함께 사는 학생에 비해 약 18만원이 더 많은 58만 7천원을 쓰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이 중 거주비로 지출되는 금액이 30만 8천원에 달했다. 절반이 넘는 금액이다. 이 때문에 대학생 10명 중 7명은 아르바이트로 생활비를 보충하고 있으며, 전체 생활비의 ‘절반 이상’을 아르바이트로 충당한다는 학생도 34.3%나 됐다.

국내 대학교의 기숙사 수용률은 대개 10%를 넘지 않는 수준이다. 비교적 높은 수준이라는 서울대학교의 경우도 12%에 지나지 않는다. 그마저도 신입생이나 외국인 유학생에게 우선권이 주어지는 경우가 많다. 부모님과 함께 사는 학생을 제외하면, 많은 수의 학생들이 입학해서 졸업할 때까지 늘 거주의 불안을 겪을 수밖에 없는 이유다. 설사 졸업을 하더라도 거주의 불안은 ‘유연한’ 노동시장의 고용불안과 만나 더 크고 항상적인 불안으로 이어진다. ‘불안’은 그렇게 이 시대 20대의 청춘 곁에 그림자처럼 따라 붙어있는 듯 하다. 그래도 무언가 '열심히' 살고자 하는 20대 빛나는 청춘은 또 그대로 빛을 내고 있었다.

캠퍼스 거리에는 어느새 목련이 흐드러지게 폈다. 짧은 봄의 지속을 ‘불안해’하듯, 꽃잎들이 쉴새없이 바람에 몸을 떨고 있었다.